그는 멋스러운 실크 넥타이와 고급 정장 차림새보다 회색 작업복이 더욱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는 거제 앞바다 강풍이 몰아치는 현장을 누비며 현업을 꼼꼼히 챙기느라 쉴 틈이 없다. 한성환 대우조선해양 정보기술(IT) 담당 이사(CIO·51). 그는 현업의 신뢰가 없으면 절대 좋은 IT 기획이 있을 수 없다며 ‘삼현주의(三現主義)’ 실현을 외치는 야전사령관을 자임한다.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느끼는’ 삼현주의를 넘어 현장에서 해결한 뒤 직접 확인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도 그의 일하는 습관에서 나왔다. 그의 얘기 한 토막이 흥미롭게 꽂혔다. “조선산업 1위였던 일본을 누르고 우리나라를 조선강국으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의 하나는 ‘IT’입니다.” IT 혁신 없이는 조선소 운영과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현업과의 친밀도를 바탕으로 IT시스템을 지금보다 한층 고도화해 ‘디지털 조선강국’을 더욱 굳히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그의 꿈과 의욕이 어우러져 아직 북풍이 한창인 거제도 현장은 연초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IT만이 중·일의 추격을 따돌리는 비책
◇“조선IT 조선강국 지름길”=“대우조선해양의 IT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세요? 대우조선해양이 국내 조선소 처음으로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구축했을 때 인터페이스를 위한 데이터량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마스터데이터만 3500만건에 달했죠. 협력사만 해도 3700여개입니다. 다른 제조산업의 IT가 고등학교 축구 수준이라면 조선 IT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 수준입니다.”
그는 현재 대우조선에서 경영혁신과 전사 IT 기획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대우조선이 세계 최대 조선 업체인만큼 IT시스템을 운용하는 게 녹록지 않다고 말했다. 직원 수가 2만8000여명에 달하고, 사업 구조가 전형적인 수주산업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IT시스템의 구축과 운용이 매우 특수하다는 것. 복잡하고 거대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혁신적인 IT시스템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환경이어서 쉽지 않은 일이다. 대우조선해양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이 대부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혁신’으로 평가되는 이유기도 하다.
“지난 20여년간 선가 하락과 원자재 가격 폭등에도 인력 증가 없이 20배 이상의 매출 신장을 이룩했습니다. 당연히 IT 혁신이 큰 역할을 했지요. 지금 우리 조선산업은 중국의 값싼 인건비와 일본의 기술력에 협공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향후 국내 조선 사업이 국제무대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IT시스템의 고도화가 절실합니다.”
그는 이제 조선업이 단순 제조업을 넘어 IT와 융합된 첨단 제조업으로 도약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중국·일본의 조선업과 차별화할 수 있는 전략이 바로 IT와의 접목이라는 것.
그는 올해 IT 혁신을 위한 야심찬 계획을 준비 중이다. 조선소의 업무 환경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협업 환경 즉, ‘RTC(Real Time Collaboration)’로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조선소를 향한 기반 마련 작업의 일환이다.
# 시·공간 뛰어넘는 실시간 협업 환경 구현
◇가상의 디지털 조선소 구현 나서=최근 대우조선해양은 협력사를 통한 사외 생산비중을 늘려나가고 있다. 협력사의 생산성과 품질, 납기 준수 등의 요인이 고스란히 대우조선해양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이에 따라 협력사와 실시간 정보 공유 등 협업 활동이 사업 성공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됐다.
실제로 대우조선해양이 하나의 선박이나 플랜트를 제작하는 데 소요되는 부품 수는 100만개에 달한다. 자동차가 2만개, 항공기가 10만개 정도의 부품이 필요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수다. 이런 부품을 조달하는 협력사가 3500여개고, 중간 제품을 조립해서 납품하는 생산협력사도 200여개에 이른다.
“사외 생산 비중이 내년에는 사내 생산량과 비슷한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따라 올해는 그동안 축적된 협업 프로세스 노하우와 IT 경험을 바탕으로 협업을 극대화하고, 아울러 RTC를 구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계획입니다.”
한 이사는 올해 RTC 구현을 위해 10개 이상의 전략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우선 올해 시작되는 중장기 프로젝트로는 디지털생산시스템(DMS), 선박생애주기관리시스템(조선PLM), 공급망관리(SCM) 등을 들 수 있다.
DMS의 경우 아주대학교와 향후 5년간 국책사업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는 대우조선해양을 가상세계 커뮤니티인 ‘세컨드 라이프’처럼 만들겠다는 것. 시뮬레이션과 에뮬레이션 기술을 선박건조에 응용함으로써 최적의 생산 환경을 기획해 자원을 배분하고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선박을 수주한 뒤 생산하는 과정을 가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3D게임처럼 만들 생각입니다. 조선소의 미래 경영 환경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를 기반으로 주요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고, 자원 배분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것입니다.”
한 이사는 DMS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에 PLM도 구축할 계획이다. 영업·설계·생산·운항·유지보수·검사·폐선에 이르는 생애주기 전반의 정보를 통합 연계 관리할 수 있는 기반구축 작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차세대 설계시스템(CAD)도 연동할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수주부터 선박을 건조해 인도해 주는 것까지만 사업 분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운영과 소멸, 폐기 처분되는 순간까지 IT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선박 평균 수명이 30년 정도 되는데, 탄생부터 소멸까지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DMS로는 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고 PLM로는 시간을 초월하는 실시간 협업 환경을 만들 계획입니다.”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SCM 프로젝트가 여기에 합쳐진다면 환상의 궁합을 보여줄 것이다. SCM을 기반으로 협력사들과 설계, 자재, 일정 등 정보를 웹 환경으로 공유함으로써 정보의 비대칭성을 줄여 효율적인 협업 체계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시스템은 오는 8월 개통될 예정이다.
# 조선 업계 ‘IBM’으로 등극
◇새로운 수익 창출 위한 노력 = 최근 한 이사의 고민은 자사의 조선 IT를 더욱 성숙시켜 새로운 사업기회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동안 혁신 IT 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해온만큼 관련 인력이나 기술 등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됐다. 실제로 대우조선해양의 IT 관련 담당자들의 평균 근무연수는 15년이 넘을 정도로 베테랑급 인력이 대부분이다. 한 이사는 이런 자원을 그냥 내버려두기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최근 큰일을 하나 벌였다. 국내 조선소로는 처음으로 신규 설립되는 해외 조선소의 IT 기획 및 운영을 담당하는 프로젝트를 맡은 것이다.
“사고가 난 배를 수리하고 유지보수를 전문으로 하는 조선소가 중동 지역 오만에 설립되는데, 그 조선소의 모든 IT 컨설팅 및 구축 사업을 대우조선해양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해외 조선소의 IT시스템을 총괄하는 사업은 국내 조선소로서는 처음 시도되는 것입니다.” 이 사업을 통해 한 이사는 돈만 쓰는 부서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해 수익창출에 기여할 수 있는 부서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재 대우조선해양은 지분 매각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지분 매각을 좋은 기회로 활용할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할 회사의 IT 조직과 연계할 수 있다면 더욱 많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IT 애플리케이션을 상품화하거나 수십년간의 경험을 컨설팅하는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 시나리오를 예상해 세심하게 준비 중입니다. 머지않아 조선 업계의 IBM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거제=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