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대표적 메가트렌드는 서로 다른 것끼리 하나로 섞이는 ‘융합(convergence)’이다. 방송과 통신이 하나가 되고 IT·BT·NT가 융합해서 새로운 산업을 만든다. 서비스도 융합이 대세다. 맥도널드에서 고급커피를 팔고 편의점에서 DVD도 대여한다. 문제는 융합 추세를 따라해도 미래가 불확실한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디지털 분야의 융합 트렌드는 여러 산업군의 수익성을 동반하락시키고 있다. 해결책은 기술이 아닌 소비자 중심의 맞춤형 융합이란 주장이 나왔다.
디지털 컨버전스는 소비자에게는 큰 축복이다. 휴대폰에 카메라와 MP3P, TV, PMP, PC, 게임기까지 소비자가 원하는 건 뭐든지 넝쿨채로 갖다 붙여서 복합상품을 만들어낸다. 하나만 사면 다른 제품을 따로 구매하지 않아도 각기 다른 기능을 즐길 수 있으니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업 측에선 디지털 컨버전스로 인해 고유한 시장영역과 안정된 사업모델이 파괴되고 원치 않는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네트워크 분야를 살펴보면 디지털 컨버전스로 IP 기반의 방송·통신·인터넷 융합서비스가 등장했다. 지난해 11월 시작된 IPTV 서비스로 네트워크 사업자 간 결합상품 경쟁이 심화되는 추세다. 실제로 IPTV는 콘텐츠 확보와 망 고도화 비용 때문에 예상보다 저조한 가입률로 조기수익 창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존 유선방송 사업자도 IPTV 등장 여파로 무한경쟁에 휘말리기 직전이다. 디바이스 분야에서 과거 PC, TV, 휴대폰은 기능별로 특화된 별개의 시장이었지만 요즘은 기능이 점차 평준화되고 있다. 이제는 스크린 크기와 사용공간에 따라 제품군을 구별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을 정도다. 디지털 디바이스의 종류와 기능이 계속 늘면서 일부 소비자는 과잉 컨버전스의 피로함을 호소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기능의 컨버전스를 선호하지만 사용자 환경은 단순하고 친숙한 것을 선호한다. 콘텐츠 분야에서 방송과 통신 콘텐츠가 웹 기반으로 영역구별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양방향 콘텐츠 수요가 늘고 있다.
그동안 인터넷은 포털이, 방송 미디어는 복합미디어기업이, 모바일 서비스는 이동통신사가 플랫폼을 장악해왔다. 이러한 게임의 법칙은 디지털 컨버전스가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합함에 따라 깨지고 있다. 이제 통합 플랫폼을 선점하기 위한 거대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고 애플, 노키아 등 제조업체도 새롭게 플랫폼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영역별로 형성된 여러 디지털 산업의 대표기업이 융합상품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IT 시장 전체가 급격히 레드오션화되는 상황이다.
◇디지털 융합은 끝났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제 디지털 컨버전스는 끝나고 라이프 컨버전스(생활 융합)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휴대폰과 카메라를 합치고 IPTV로 인터넷 서핑을 하는 디지털 융합 바람이 실제로 잠잠해지는 건 아니다. 다만 사업적으로 큰돈을 벌기가 힘들 것이란 전망이다. 기존 디지털 컨버전스는 단순히 결합상품을 소비자에 많이 팔기 위한 공급자 중심의 대량 마케팅(mass marketing) 전략이다.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을 추가하면 소비자가 많이 살 것이란 논리다. 반면 라이프 컨버전스는 소비자 중심의 대량 주문생산(mass customization) 전략이다. 개별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을 모두 갖춘 휴대폰은 무조건 팔린다는 식의 논리다. 라이프 컨버전스는 개별 소비자에게 적합한 △IT 자원 △콘텐츠 △광고를 맞춤형으로 선별해서 유무선 네트워크로 24시간 중단 없이 제공하는 형태를 추구한다.
◇맞춤형 IT 자원→라이프 컨버전스에 적합한 IT 자원(HW+SW)은 기존 패키지 형태에서 네트워크 서비스로 바뀔 전망이다. IT 기기와 SW를 패키지로 판매하는 것보다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면 훨씬 다양한 소비자 요구를 충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메모리 카드 옵션은 한정돼 있지만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하면 외장 메모리는 무한히 다양하고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이 가능해진다. 맞춤형 IT 자원의 주요 특징은 껍데기는 달라도 속은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통일성이다. 개인이 PC, 휴대폰, TV 등 다양한 정보기기를 이용해도 상호정보를 일치시키고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데스크톱PC의 이용은 줄고, 노트북PC, TV, 휴대폰 등 컴퓨팅 성능이 취약한 단말기가 공간별로 다양하게 득세하면서 네트워크 기반의 중단 없는 컴퓨팅 수요가 증가할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e메일, 주소록, 일정, 파일 등 다양한 개인정보를 유무선 네트워크로 지원하는 웹 기반 애플리케이션이 부상하고 있다. 경기침체를 겪으며 네트워크 서비스로 바뀐 IT 자원은 비용절감 효과가 커서 주목을 받게 된다.
◇맞춤형 콘텐츠→라이프 컨버전스에 걸맞은 콘텐츠로는 포화상태에 도달한 대중미디어가 아닌 개인미디어가 부상한다. 개인미디어는 방송, 인터넷,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콘텐츠 중 소비자에게 적합한 것만 선별해 맞춤형 콘텐츠로 재구성하는 형태다. 구글, MS는 이미 개인미디어형 포털서비스를 제공해왔고 국내에서도 네이버가 오픈캐스트 서비스와 함께 유사한 개인미디어 포털서비스를 시작했다. 자유, 참여, 역동성, 상호연결을 특성으로 하는 개인미디어는 고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반면에 대다수 미디어 소비자는 여전히 수동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용가능한 개인 맞춤형 미디어의 개발이 요구된다. 향후 소비자별로 개인맞춤형 방송채널을 자동 편성하거나 아마존 도서추천처럼 적합한 주문형비디오를 추천하는 서비스가 개발될 가능성도 높다.
◇맞춤형 광고→라이프 컨버전스를 위한 광고는 콘텐츠가 아닌 이용자가 주도하는 패턴으로 진화할 것이다. 광고 비즈니스 모델은 처음에는 콘텐츠에 광고를 끼워넣는 방식을 썼지만 최근에는 구글이 시작한 검색광고가 각광받고 있다. 미래에는 이용자의 특성을 파악해 가장 적합한 광고를 제공하는 이용자 기반 광고가 부상할 전망이다. 인터넷 이용패턴을 분석해 소비자의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광고주는 정밀하게 선별된 소비자에게 우선적으로 광고를 제공할 수 있다. 타깃광고의 등장으로 포털 및 방송채널 사업자가 주도하는 뉴미디어 광고시장에서 네트워크 사업자의 역할이 확대될 것이다. 맞춤형 광고시장에서는 과거 저평가되던 니치 콘텐츠도 짭짤한 수익을 올리는 롱테일의 법칙이 통하게 된다. NHN은 다음달부터 네이버 메인화면에 이용자가 직접 선택하고 기능을 제어하는 새로운 개념의 광고인 ‘애드캐스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용자 의지나 관심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보여졌던 기존 광고와 달리 애드캐스트는 고객이 광고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맞춤형 광고를 지향하고 있다.
◇생활 융합의 핵심 키워드. 소비자 정보
라이프 컨버전스 전략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개별 소비자 눈높이에 맞춘 융합서비스를 언제 어디서나 제공하는 토털 시스템을 갖추라. 그러면 미래의 신소비시장을 장악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디지털 컨버전스를 쫓다가 레드오션에 빠진 기업 측에서 라이프 컨버전스는 꽤 설득력이 있는 논리임에 틀림없다. 디지털 컨버전스가 제과회사에서 똑같이 출시한 종합선물세트라면 라이프 컨버전스는 소비자가 직접 고른 과자로만 박스를 채운 맞춤형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과자만 골라 담은 종합선물세트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기업체가 융합서비스를 제공하려 해도 개별 소비자의 취향과 눈높이, 즉 어린이가 무슨 과자를 좋아하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개별 소비자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맞춤형 서비스는 불가능하다. 보고서는 라이프 컨버전스의 성공전략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해서 기업체에 제공하는 정보 중개자(infomediary)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용자의 동의하에 고객 특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IT 자원, 콘텐츠, 광고 등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성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기업체가 생활융합을 주도하려면 풍부한 IT 자원, 콘텐츠, 광고보다도 소비자 정보가 가장 중요한 핵심역량”이라면서 “고객을 가장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사업자가 시장을 선점한다. 다른 분야 업체들과 정보공유로 교차마케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정보 중개자 플랫폼을 선점하면 다양한 개인맞춤형 서비스로 확대된다. 고객의 특성에 맞춘 맞춤형 전자상거래, 헬스, 프로모션이 가능해진다. 소비자 정보에서 특히 가치가 높은 분야는 개인의 자산 및 소비내역에 관한 실시간 정보다. 현재 개인의 금융정보는 현재 은행과 카드, 증권사 등이 따로 관리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 차원 높은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위해서 대다수 금융기관이 정보공유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라고 지적하며 끝을 맺는다.
라이프 컨버전스는 디지털 융합이 레드오션을 촉진하지 않고 서로 상생모델을 만드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 국내 기업들이 애플의 디자인, 구글의 창의성을 따라잡진 못해도 앞선 소비자 정보를 바탕으로 시장우위를 차지하는 필승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활융합의 핵심키인 소비자 정보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생활 침해나 오남용의 우려는 없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생활 전체를 커버하는 맞춤형 융합서비스란 개념이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에 편향된 시장구도를 촉진할 가능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표기업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소비자 정보를 독식하면 평범한 개인의 생활 전체를 거대한 융합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금산분리완화로 은행지분을 보유할 대기업들이 개인 금융정보와 서비스를 결합해 어떤 컨버전스 상품을 내놓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