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전통과 IT가 살아숨쉬는 교토

박물관 내 70개 LCD 화면을 밟으며 몸으로 문화를 체험하는 관람객들.
박물관 내 70개 LCD 화면을 밟으며 몸으로 문화를 체험하는 관람객들.

 일본 교토는 매우 흥미로운 도시다. 교토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현재의 도쿄인 에도로 옮기기 전까지 8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다. 교토는 긴가쿠지(金閣寺)나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등 수많은 문화재와 전통문화가 남아 있다.

 교토에서 북서쪽으로 30분쯤 차를 달리면 작은 마을 사가노가 나온다. 이곳에 교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색 박물관 ‘시구레덴(時雨殿)’이 있다. 세계 최고의 게임업체로 평가받는 닌텐도가 20억엔을 기증해 만든 시구레덴은 일본의 전통문학인 ‘오구라햐쿠닌잇슈(小倉百人一首)’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일본의 문인인 후지와라노 데이카가 만든 일종의 시집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100명의 시인이 지은 일본 전통 운문 와카(和歌) 100작품을 모았다.

 햐쿠닌잇슈는 시구레덴이라는 산장을 장식하기 위해 네모난 나무 판에 썼다고 전해진다. 이 모습이 현재에 전해져 카드와 같은 형태로 자리 잡았다. 햐쿠닌잇슈는 일본인에게 시집 형태보다 카드로서 지명도가 높다.

 시구레덴에는 햐쿠닌잇슈가 첨단 IT 제품과 만나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시구레덴에 들어가면 휴대형 게임기 ‘닌텐도 DS’를 나눠준다. 박물관 내에는 45인치 크기의 LCD 70개가 바닥에 깔려 있다. LCD 위에 올라서면 70개의 LCD 전체가 교토 위성지도로 바뀐다. 동시에 닌텐도 DS 화면에는 검색창이 나타난다.

 궁금한 교토의 명소를 선택하면 LCD화면에 한 마리 새가 나타나 방문객을 안내한다. 새를 쫓아가다 보면 교토의 명소를 골고루 방문할 수 있다. 일종의 ‘교토 둘러보기’ 게임인 셈.

 게임기를 통해 교토의 향토문화를 익히다보면 LCD화면은 거대한 시집으로 바뀐다. 70개의 LCD에는 백인일수 시집에 실린 시가 한 편씩 나타난다. 아울러 방문객이 들고 있는 닌텐도 DS 화면에도 시가 한 편 나타난다.

 게임기 화면에 나타난 시와 같은 내용을 LCD 화면에서 찾아 발로 선택하면 점수가 올라간다. 지루한 전통문학을 게임을 통해 즐겁게 익히도록 만든 아이디어다.

 시구레덴 벽으로 다가가면 거대한 전자병풍이 둘러 서 있다. 병풍마다 역시 각기 다른 시가 적혀 있다. 앞에 서면 방문객의 게임기에서는 음성으로 해당 시가 흐른다. 그 시에 대한 해설도 글로 게임기 화면에 나온다.

 닌텐도의 아이디어 덕분에 시구레덴의 하루 방문객은 1000명을 넘는다. 외국인뿐 아니라 일본인 역시 가족 단위로 찾아와 전통 문학과 IT가 만나 주는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한다.

 도요타 겐 닌텐도 홍보실장은 “닌텐도는 항상 기존 기술을 이용해 이용자에게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주려고 한다”며 “시구레덴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아이디어도 닌텐도의 독창성을 잘 나타내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사실 시구레덴에 사용된 기술은 간단한 적외선 센서와 휴대형 게임기, LCD가 전부다. 닌텐도 DS 역시 다른 휴대형 게임기에 비해 부품을 뜯어보면 첨단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평범한 IT제품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만나 최고의 효율을 내는 박물관이 된 셈이다.

 시구레덴뿐 아니라 교토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부품 업체가 많다. 교세라와 무라타제작소, 롬, 일본전산 등 10여개에 달하는 부품 업체는 교토의 자랑이자 일본 전자산업 경쟁력의 원천이다.

 교토에 둥지를 틀고 사업을 꾸려온 이들은 일본이 장기 불황으로 고전하는 동안 일본의 대표업체들에 비해 고성장과 고수익을 실현하고 있다. 총자산이익률(ROA)을 기준으로 타 지역 전자업체에 비해 5∼7배 격차를 보일 정도다. 이들 기업은 지난 14년간 연평균 6.7%라는 높은 매출이익률을 기록했으며 IT 버블이 붕괴한 지난 2001년에도 이익률이 3.4%에 달했다.

 이 업체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로 특정 고객사에 종속적이지 않다. 인재 수급도 눈길을 끈다. 현금 1억엔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로 최고의 인재를 키운다. 이 점이 불황에도 교토의 부품 기업이 높은 성장률을 보이는 비결이다. 교토 부품 업체의 공통된 특성을 정리하면 △카리스마를 가진 오너 △현금 흐름과 무차입 지향 △기술 기반의 사업 특화와 글로벌 시장 도전 △열린 수평적 분업구조 구축 등이다.

 쓰에마쓰 교토대 경제학부 교수는 버블 붕괴 후 일본 기업들이 업적 악화에 허덕이고 ‘일본적 경영’의 문제점이 부각될 때, 교토에 근거지를 둔 첨단 IT기업들에 주목했다. 이들은 높은 성장률을 보였고, 자기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이 높았다. 쓰에마쓰 교수는 이에 주목, 이들이 갖는 특징을 ‘교토식 경영’으로 명명했다.

 일본 재계에서 영향력 있는 경영자들이 교토 부품 업체들의 경영에 주목했다. 사토 롬 사장, 이나모리 교세라 명예회장, 시게노부 일본전산 회장 겸 사장이 일본식도 아니고 미국식도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실적을 내고, 이것이 젊은 경영자층에 급속도로 확산됐다. 나카무라 마쓰시타 사장은 ‘우리가 배워야 할 기업은 롬과 무라타제작소’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구레덴이나 부품 기업 모두 교토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유서 깊은 건축물이 교토의 과거를 말해준다면 게임과 부품은 교토의 현재를 대변한다. 전통과 첨단이 함께 숨쉬는 곳, 교토를 한마디로 대변할 수 있는 말이다.

 교토(일본)=장동준기자 dj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