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크리`시대, 산업지형이 바뀐다](3)수출 딜레마

 전체 매출 가운데 수출이 90%에 달하는 셋톱박스 업체 A사는 부품과 원자재 구매 프로그램을 원점에서 재조정하고 있다. 높은 환율로 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생겨 수출이 크게 늘 것이라는 게 상식이지만 오히려 비상경영의 고삐를 더욱 죄고 있다. 바로 원자재 가격 때문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원자재 수입 가격이 수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원화 가치가 기업 경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외에서 수입하는 원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기업 마케팅과 프로모션까지 타격을 받고 있다. 물론 고환율은 전자산업에 긍정적인 효과가 분명히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전자산업은 고환율로 해외 시장에서 주요 품목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준다. 수입을 억제해 전체 경제에서 보면 무역수지를 개선시킨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경기침체 상황에서는 환율 효과가 크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전처럼 환율 상승에 따른 일방적인 수혜는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원자재 가격에 영향을 주면서 경영 상태에 ‘빨간불’이 켜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흔히 환율이 10원 오를 때 삼성전자는 2000억원, LG전자는 700억원 정도의 영업이익이 발생한다. 불행히도 원부자재 가격 상승과 수요 급감 상황에서는 이런 계산법이 통하지 않는다. 고환율에 따른 원자재 구매 비용과 환차손을 감안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LG전자 측은 “환율이 오르면 해외에서 가격 경쟁력이 생기는 건 사실이지만 액면 그대로 수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며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경기 위기에서는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수출통계가 그대로 보여준다. 정부는 지난 2월 전년 같은 달보다 24%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5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이다. 수출 주력 품목인 반도체는 PC 시장 침체 여파로 전년 동월보다 40.6% 줄어든 15억4000만달러에 그쳤다. 환율로 가격 경쟁력이 생겼지만 여전히 수출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다. LCD 패널도 전년 동월보다 23.9% 줄어든 15억달러 수출에 머물렀다.

 고환율이 일부 품목에서 분명 수출 효과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건전한 경영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널뛰기 환율’의 더 큰 폐해는 환차손이다.

 삼성전자 한 관계자는 “환율이 고공비행할 수록 외화 단기차입금으로 오히려 영업외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보유 외화자산이 3조6613억원, 부채가 6조117억원으로 빚이 2조4404억원이나 많았다.

 외화자산 중 달러 자산 비율은 77.9%(2조8511억원)였고 외화 부채 중 달러 부채는 82.5%인 5조353억원으로 달러로 갚아야 할 빚이 자산보다 더 많았다.

 LG전자도 1조4694억원으로 외화 부채가 외화자산을 앞질렀다. 달러 부채는 환율 변동에 따라 환차손 규모가 그만큼 커질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환율 상승보다 ‘환율안정’이 수출을 포함한 전체 경영에 더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