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한파가 ‘전시회의 천국’ 독일 하노버에도 몰아쳤다. EU 전역에 닥치고 있는 경제 위기에 직격탄을 맞은 모습이다.
독일 하노버는 ICT 전시회 ‘세빗(Cebit)’과 산업 박람회 ‘하노버 메세(Hannover Messe)’를 비롯해 연간 50여개의 크고 작은 행사가 개최되는 ‘메세(전시회)의 도시’다.
하노버를 비롯해 함부르크·브레멘 등 인근 도시는 숙박·관광 등 부문에서 이들 전시회 관련 특수를 한껏 누려왔다. 하지만 최근 열린 ‘세빗 2009’는 이런 하노버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세계 최대 ICT 전시회 명성은 전설 속으로=세빗 2009에서는 독일의 침체된 경기가 그대로 반영됐다. 전시 면적은 20만㎡로 지난해보다 20% 이상 줄었다. 참여업체 역시 5300여곳에서 4262곳으로 1000곳 이상 급감했다. 관람객도 전년보다 20%가량 줄어든 40만명에 그친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대기업들의 불참은 전시장 분위기를 한층 어둡게 만들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대기업은 물론이고 도시바·교세라 등 글로벌 기업이 대거 불참을 선언하면서 축제 분위기가 사라졌다. IBM 등 다국적 기업도 독일 지사 차원에서 전시장을 마련했을 뿐이다.
이런 전시장의 분위기는 당장 하노버 시내로도 이어졌다. 해마다 이맘때 전시회 참관을 하러 온 비즈니스맨으로 북적이던 하노버 중앙역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감지하기 어려웠다.
해마다 세빗을 참관해왔다는 스루드 셰리프 아부다비 국립은행(NBAD) CIO는 “올해는 예년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면서 “경기 침체의 여파가 세빗에까지 몰아닥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시장 흥행도 양극화가 뚜렷했다. 시스템 운용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기업용 엔터프라이즈 제품이 눈길을 모은 반면에 소비 둔화로 개인 시장을 겨냥한 전시는 바이어 몰이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용 절감이 화두로 부상하면서 고효율, 저비용 제품이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체감 온도는 ‘영하’=전시 현장을 벗어나 지역 상인들이 실제로 느끼는 기온은 더욱 낮았다.
하노버 시내의 ‘호텔 프라자’에 근무하는 마리아 슈미트씨는 “예년에는 세빗 개최 두세 달 전에 이미 숙박 예약이 완료됐지만 올해는 빈방이 남아 있다”고 토로했다. 하노버 시내의 호텔이 부족해 외곽지역에 숙소를 정해놓고 기차로 오가며 세빗 관람을 했던 예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런 현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지면서 하노버 숙박 업계는 당장 다음달 열리는 하노버 메세 기간에 평소보다 숙박비를 올리던 관행을 재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세빗 주최 측 역시 어려움 타개를 위해 변화를 예고하고 나섰다. 루프트한자 등 항공사와 협의해 항공료를 내리는 한편 참가 기업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시회 기간을 7일에서 5일로 단축하는 고육지책까지 마련하고 있다. 주말을 제외함으로써 일반 소비자보다 기업 고객에 무게 중심을 두겠다는 전략이다.
독일 대표 전시회 주관사인 도이치메세의 스벤 프루저 부사장은 “참석 기업과 관람객들의 부담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행사를 기획할 것”이라며 전시회 동향의 변화를 선언했다.
◇경기 침체 여파 독일 전역으로 확대=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비단 하노버뿐만이 아니다. EU 전역에 몰아닥치고 있는 경기 한파로 연간 500여개의 국제적인 행사가 열리는 독일은 초비상 상태다. 아예 처음부터 행사 규모를 축소하는가 하면 행사 자체를 접는 곳도 늘고 있다.
실제로 1년여 만에 유로 환율이 두 배 가까이 뛰어오르면서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독일 경제는 급격히 침몰하고 있다. 지난해 3분기 독일 GDP는 2분기(-0.4%)에 이어 0.5%가 또 감소했다.
여기에 경제 전문가들은 올해의 경기 전망이 더 어둡다고 전망하는 상황이다. 유력 연구소들은 올해 독일의 경제성장률을 2%대로 제시했고 경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수축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당장 이런 경기 수축은 독일에 체류하는 외국인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독일 브레멘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이경미씨(29)는 “환율이 두 배로 올라 한국에서 같은 생활비를 부쳐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며 “호구지책으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지만 유학생들이 취직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이마저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유학생들은 궁여지책으로 파트타임 베이비시터, 청소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이씨는 “유학생들은 외식을 자제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라면 등 생필품을 받아 쓰고 있다”면서 “고환율이 지속되면서 유학을 접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이 이런 경제 위기를 헤치고 전시회의 천국으로 귀환할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독일은 기업의 6개월 후 경기전망을 보여주는 ‘ZEW 투자신뢰지수’가 5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는 등 지표가 호전되면서 경기 회복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하노버(독일)=황지혜기자 goti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