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의 시네마 읽기] 매란방

[한정훈의 시네마 읽기] 매란방

 청나라 18세기 후반 처음 등장한 이후 19세기 과도기를 거쳐 20세기 중·후반까지 경극은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관중을 사로잡으며 중국의 대표 예술로 자리 잡았다. 여성의 경극 진출이 금기시되자 남성이 여성 역할까지 하게 됐고 이런 여장 전문 남자배우를 ‘단’이라고 칭했다. 단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을 4대 명단으로 추대했다(우리는 3명이지만 중국은 4명을 좋아한다). 4대 명단은 쉰후이성, 상샤오윈, 청옌추 그리고 메이란팡이다. 메이란팡은 그중에서도 ‘경극대왕(京劇大王)’이라고 불리며 단연 으뜸의 인기를 얻었다.

 메이란팡은 1894년 10월 경극배우의 집에서 태어나 1961년 죽을 때까지 한평생 경극만을 한 인물이다. 매끄러운 목소리, 깔끔한 무대 매너, 중후한 연기력 등 연기의 삼박자로 중국 국민 배우로 추앙받았다. 1929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최초로 브로드웨이 공연을 성사시키도 한다. 특히, 메이란팡은 공산화된 중국에서도 존중받은 몇 안 되는 예술가였다. 중국 문학 예술계 연합회 부주석, 중국경극원장, 중국 희곡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런 국민배우가 영화화된다는 말에 중국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과연 누가 감독을 맡을까. 그러나 감독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경극 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맞다. ‘패왕별희’를 맡은 천 카이거 외는 감독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물론 패왕별희의 원래 모델도 메이란팡이었다.

 영화 ‘매란방(천 카이거 감독, 리밍·장쯔이·쑨훙레이·천훙 주연)’은 이렇게 태어났다. 오는 4월 9일 국내에 소개되는 ‘매란방’은 신도 뛰어넘을 수 없었던 재능을 가진 배우라는 메이란팡의 일대기를 그린다. 명망 있는 경극 가문에서 태어난 메이란팡(리밍). 시대에 앞선 새로운 무대 스타일을 선보여 스타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이는 전통을 고수하는 스승과 예기치 않은 갈등을 야기하고 급기야 두 사람은 경극계 일대 파란을 일으키는 대결을 펼치게 된다. 물론 그는 스승을 뛰어넘는다. 그런 그가 남장 전문 여자 배우 맹소동(장쯔이)을 만나면서 달라진다. 무대에서 나눈 교감은 사랑으로 변하고 메이란팡은 처음으로 평범한 일상을 꿈꾼다. 그러나 일상은 메이란팡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스캔들을 걱정한 의형제 추루바이 등 일부는 메이란팡의 브로드웨이 진출을 계획하게 된다.

 영화를 먼저 감상해 본 소감을 말하자면 ‘매란방’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메이란팡이 등장하지 않는 ‘매란방’이며 다른 하나는 이례적으로 평이한 결론이다. 영화에서 메이란팡의 이름은 1분 단위로 계속 등장하지만 우리가 그를 인식하는 건 영화 시작(118분) 한 시간 뒤다. 극 중 메이란팡 역할을 맡은 리밍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인 셈이다. 뒤늦게 등장한 메이란팡은 나오자마자 국민배우 행세를 한다. 우리는 그의 고달픈 훈육 과정을 느낀 적도 없고 가슴 뛰는 감동의 순간을 경험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관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영화를 느낄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이와 함께 평이한 결론도 의외다. 이는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구동한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는 개그우먼 박지선의 말과 같이 ‘참∼쉽제’다. 경극 배우로 태어나 경극대왕으로 죽는다는 것이 메인 플롯이다. 물론 사랑도 잠시 등장하지만 장쯔이의 매력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특히, 이런 플롯에다 실패 없는 메이란팡의 삶은 관객을 수면에 빠뜨릴 위험성까지 있다. 한잠 잔 관객이 다시 깨어나도 메이란팡의 위상은 그대로다. 모름지기 예술로 일어선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면 그를 파괴시킬 위험이 두세 번 등장해야 맛이다. 이런 조마조마한 매력은 ‘매란방’엔 없다.

 한정훈기자 existe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