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산업이 글로벌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가까스로 수주한 대규모 해외 건설 프로젝트가 갑자기 취소되는가 하면 주택 미분양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구조조정 바람도 거세게 일고 있다. 건설업계의 이 같은 분위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자연의 섭리대로 봄은 어김없이 왔지만, 건설업계 종사자들의 마음은 스산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불황기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다. 자신을 티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국내 건설 산업을 선진화하는 데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건설업계 최고정보책임자(CIO)들이다. 위기 상황일수록 묵묵히 땀을 흘려왔던 CIO들은 위기에 더욱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건설 업계 CIO들의 입을 통해 건설업계의 불황 극복방안과 IT전략을 들어봤다.
◇위기 때 준비해야=국내 주요 건설사들이 생존과 적응을 위한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지상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건설산업의 IT전략을 책임지고 있는 CIO들의 최우선 생존 전략은 ‘경영시스템의 선진화’다. 자사의 IT시스템들을 한층 고도화하고 기능별로 재정립해 예측가능한 경영시스템으로 발전시킨다는 의미다. 전사적 자원관리(ERP)를 비롯, 경영정보시스템(MIS), 프로젝트관리시스템(PMS) 등 업그레이드 작업을 추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8년 매출 기준 1위 업체인 현대건설도 올해 다수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우선 ERP 업그레이드로 BW, SEM, CPM 등 전략적 차원의 시스템 확장에 본격 나서고 있다. 플랜트 통합배관관리시스템 등 설계 엔지니어링 시스템 통합 및 기술 시공관리업무도 강화한다. 또 미래성장 기반조성을 위한 EA(Enterprise Architecture) 기반의 정보화 전략 수립을 비롯, △사내외 이해당사자 간의 효율적 커뮤니케이션 지원을 위한 차세대 그룹웨어 구축 등 전사적 프로젝트도 다수 계획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주요 건설사의 올해 IT 예산을 살펴봐도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오히려 30% 이상 증가한 곳도 많았다. 물론 IT 예산이 300억원 미만으로 매출액 대비 턱없이 적은 비중이지만, 점진적으로 IT 투자를 확대해 가면서 위기 극복에 나서고 있다. 이는 건설사들이 지금이 향후 도래할 기회에 대비할 때라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민 삼성건설 상무는 “과거 건설업은 속칭 ‘노가다’ 산업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시스템 산업으로 바뀌었다”며 “기계화 시공 등을 통해 IT 시스템의 중요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특히 경영시스템은 건설사들이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데 획기적인 지원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해외 현장 지원에 총력=국내 건설사 CIO들은 철저하게 자사 비즈니스 역량을 강화하는 데 IT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재 국내 주요 건설사들은 해외 시장 발굴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중에서도 재무상태가 양호한 대형 건설사들은 지금의 불황을 기회이자 새로운 영역에 진출할 호기로 보고 있다. 즉, 수익성이 급락하고 있는 국내보다는 무한한 기회가 열려 있는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CIO들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오석 롯데건설 정보화추진단장은 “해외 현장이 확대되면서 전문관리 시스템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했다”며 “이에 따라 본사와 현장, 설계사와 시행사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전문관리시스템이나 공사관리 시스템 등 IT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조용일 포스코건설 이사는 “최근 해외 시장 확대에 대비해 글로벌 표준화에 따른 프로젝트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환율 리스크 관리 시스템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며 “해외 현장도 본사와 동일한 IT 환경을 제공해 해외 사업에서도 IT 지원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설업체들의 해외 시장 진출에 따라 IT 시스템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 협업 시스템이다. 물론 국내 현장에서는 이미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해외 현장까지는 그동안 연결고리가 석연치 않았다.
서우석 롯데건설 단장은 “올해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협업 기능 강화”라며 “건설 현장은 이해당사자가 많은데, 이들이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프로젝트 진행과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대림건설도 올해 ‘스마트 대림’이라는 기치 아래 업무혁신을 위한 협업을 강조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근무할 수 있도록 버추얼 오피스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의 협업 기능들을 보다 강화해 해외 현장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건설 라이프사이클 혁신=일반적으로 IT 산업계에서는 국내 건설사들의 정보화 수준이 다른 산업에 비해 낮다고 평가한다. 산업 특성상 차세대 프로젝트 이슈를 비롯해 선진 기술들의 적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건설사 CIO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최근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는 빌딩정보관리시스템(BIM)을 소개하며 그런 평가를 일축한다. 건설업의 전체 라이프사이클을 혁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스템이 BIM이라는 것이다.
건설사에서 얘기하는 BIM은 CAD시스템을 이용한 5D 도면, 공정관리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3D 차원에서 벗어나 시간과 원가 개념까지 더해 5D로 구현하는 것이다. 즉, 3D로 도면을 비주얼화함으로써 완성된 건물 모양을 만들고, 완성된 결과물에 다양한 변수를 적용해 예측과 변경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로써 품질을 보장할 수 있고, 신속한 공정 및 비용절감이 가능해진다. 설계변경이 잦고 완성된 설계 없이 진행해오던 건설업계의 현실을 고려해 보면, 혁신적인 디지털 솔루션이라 할 수 있다.
김정민 삼성건설 상무는 “BIM은 설계부터 유지보수에 이르기까지 건설업의 라이프사이클을 일관성 있게 관리해 준다”며 “아직은 일부 영역에 우선적으로 도입해 활용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건설 산업의 미래는 BIM에 있다고 할 정도로 핵심 시스템으로 자리 잡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SK건설은 플랜트와 건축 분야에 BIM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건축 분야 적용도 검토 중이다. 권혁창 SK건설 상무는 “BIM은 실제로 지어진 상황을 날씨 등의 다양한 변수를 적용해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설계 당시 예측할 수 없었던 문제점을 미리 확인해서 개선할 수 있기 때문에 분양률도 높이고 수익도 더 많이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덕직 SAP코리아 이사는 “BIM은 공정을 관리하고, 자재나 예산관리 영역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보면 ERP 영역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건설의 앞 단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며 “ERP와는 실행예산이나 자재계획 등 부문에서 연관될 수 있으며, BIM에서 생성된 데이터가 ERP로 넘어가 계획과 실행, 관리하는 데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배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현희기자,sungh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