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게임개발자회의(GDC). 글로벌 히트 게임 ‘메탈기어’로 유명한 고지마 히데오 감독이 기조연설을 위해 단상에 섰다. ‘게임왕국’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인 그가 꺼낸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지금 미국의 게임 업체는 하드웨어 기술력과 소프트웨어 기술력, 거기에 기획력까지 더해 엄청난 게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 게임 업체는 기획력에만 의지하는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세계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닌텐도와 소니가 있는 일본. 일본의 게임 산업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일본 게임, 시장을 잃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일본 닌텐도 배우기가 한창이다. 불황을 모르는 닌텐도의 성공 전략을 벤치마킹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아가 일본 게임 산업을 향한 관심 역시 대단하다. 하지만 최근 세계 게임 시장에서 일본산 게임 위상은 예전과 같지 못하다.
일본의 게임산업 분석기관인 컴퓨터엔터테인먼트협회(CESA)에 따르면 지난 4년 동안 일본산 게임의 해외 시장 점유율은 약 20% 감소했다. 전 세계 게임 시장 전체를 100으로 가정한다면 일본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20 미만이다. 반면에 그 기간 동안 유럽 및 미국산 게임의 점유율은 두 배가 됐다. 닌텐도의 ‘위’와 ‘DS’, 소니의 ‘PS2·3’와 ‘PSP’ 같은 일본의 게임기들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지만 수익 창출인 핵심인 게임 타이틀 부문에선 힘을 잃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해외 진출의 밑거름이 되는 자국 게임 시장은 매년 커지는 외국과는 반대로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일본 게임 시장의 규모는 640억달러. 이는 763억달러였던 2007년 대비 15.3% 정도 축소된 것이며 그 결과 1970년대부터 유지해오던 단일 국가 게임 시장 규모 2위의 자리를 처음으로 영국에 내줬다.
#자기만족에 빠진 일본 게임
일본 게임 업체인 닌텐도가 매출액 및 순수익 면에서 압도적인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게임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이유는 닌텐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대형 게임 업체가 세계화에 실패한 데 있다.
단적인 예가 스퀘어에닉스다. 스퀘어에닉스는 파이널 판타지, 드래곤 퀘스트 등 일본 최고 인기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게임 개발 업체다. 하지만 이 회사는 새로 발매하는 게임 타이틀마다 세계 시장에서 외면을 받고 있다.
이 회사가 의욕적으로 전 세계에 발매한 ‘라스트램넌트’라는 게임은 일본의 대표적인 게임 잡지인 패미통에서는 40점 만점에 38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대표적인 웹진인 게임스폿이나 IGN에서는 10점 만점에 5점과 6점이라는 저조한 평가를 받았다. 이는 판매량에서도 나타났다. 판매량 역시 미국 및 유럽 게임 시장을 통틀어 38만장이라는 스퀘어에닉스의 블록버스터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실적을 기록했다. 히트 게임으로 평가를 받으려면 100만장 이상은 팔려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 게임이 세계화를 이루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 분석은 다양하지만 일본이 세계 게임 시장에서 고립돼 있다는 걸 간과했기 때문이란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을 제외한 세계 게임 시장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게임들은 일본에서 철저히 외면받는다.
2008년 전 세계적으로 각각 1400만장과 7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른 ‘GTA4’와 ‘콜오브듀티5’는 일본에서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가장 성공한 온라인 게임으로 평가받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일본에 서비스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들 역시 다른 나라의 게이머들에게 외면받는 상황이다. 일본에서 2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2008년 최고 인기 게임으로 기록된 ‘몬스터헌터 포터블2’는 미국 및 유럽 시장 전체에서 50만장에도 이르지 못했다.
사정이 이런데ㄷㅎ 많은 일본 게임 업체는 일본 시장에만 몰입돼 있다. 일본에서의 성공은 곧 세계 시장의 성공이란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 결과 일본식 일인용 롤플레잉 게임이나 수집 요소가 강조된 아이돌 마스터, 몬스터 헌터류의 게임을 만드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세계 게임 시장의 주류로 떠오른 일인칭 슈팅 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의 개발 능력은 세계적인 수준과 격차가 크다. 더욱이 일본 게임 업체의 고질적인 문제인 외국 사용자 및 개발사와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은 이 같은 문제를 더욱 고착시키고 있다.
#“이대로 가면 망한다” 자성의 목소리
이와타 사토루 닌텐도 사장은 최근 공식석상에서 일본 게임 시장의 위기와 그에 따른 게임 업체들의 수익 감소에 대한 문제점을 역설했다. 그는 “현재의 일본 게임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미국과 유럽 시장은 엄청난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일본 시장은 오히려 작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매주 일본보다 10배 가까운 게임이 팔리고 있으며 이제 일본의 게임 업체는 더 이상 일본 게임 시장에서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CESA의 회장이자 스퀘어에닉스 회장인 와다 요이치 역시 도쿄게임쇼에서 세계 시장에서 고립돼 가고 있는 일본 게임 업체들의 자성을 촉구했다.
‘언리얼’ 시리즈와 ‘기어스오브워’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팀 스위니는 일본이 오히려 신기술 습득에 주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스위니는 “일본 게임업체는 개발 생산성을 늘려주는 툴이나 미들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많은 인력이 투입돼 열심히 게임을 개발할 뿐”이라며 “일본의 구태의연한 개발 방식은 요즘의 거대한 게임 개발 프로젝트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업체들끼리 서로 커뮤니케이션도 안 하고, 기술을 숨기기에 바빠서 기술 발전이 더디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일본 게임들이 세계 시장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이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게임 판매 부진이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은 매력적인 게임기와 게임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다. 또 일본 게임 업계에서도 세계적인 흐름에 편승하려는 노력이 속속 보여 다시 반등할 가능성이 크다. 스퀘어에닉스와 고나미 등의 업체는 미국과 유럽의 유명 게임 그래픽 엔진인 언리얼 엔진이나 크라이텍 엔진을 자사의 게임에 사용하는 등 지금까지의 일본 국내의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 외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본 게임 업계가 세계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상황은 한국 게임 업계에 일종의 기회다. 한국 게임 시장은 규모 면에서는 일본 시장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일본 게임과 미국 및 유럽 게임이 동시에 받아들여지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게임 업체로 하여금 세계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도록 하는 좋은 토양이다. 실제로 메이플 스토리로 대표되는 한국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은 일본 게임이 가지고 있는 동양적 감성에 세계 시장의 흐름이자 우리가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분야인 온라인 커뮤니티 시스템을 접목시켜 세계 시장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높은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기획력의 부재는 기회를 살리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류태영 남가주대학(USC) 인터랙티브 미디어학과 연구원 tryu@usc.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