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3일. 국내 증권 업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국거래소(KRX, 옛 증권선물거래소)의 차세대 시스템이 가동되는 날이었다. 72개 증권사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시스템이 개통되는 날인만큼 모두가 숨죽여 지켜봤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긴박하게 움직인 증권사가 있었다. KRX와 같은 날 자사 차세대 시스템을 개통하는 현대증권이 그 주인공.
현대증권의 차세대 프로젝트는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이자 증권계에서도 차세대 개발 범위가 가장 넓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한국거래소의 차세대 시스템과 동시 개통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추진한 프로젝트였던만큼 업계의 최대 관심사였다.
◇최정예 멤버로 출발 = 2007년 2월 10여명의 최정예 멤버가 모였다. 이들이 바로 현대증권 차세대시스템부 구성원이다. 수백명의 IT 대군을 이끌고 현대증권의 차세대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특명을 부여받은 셈이다.
현대증권은 그해 4월 프로젝트에 착수한 이래 2년 동안 차세대 시스템 구축을 향해 달렸다.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프로젝트인만큼 초기 단계부터 현대증권은 빈틈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 프로젝트 계획단계부터 이들은 철저히, 까다롭게 준비했다. 현황 분석 작업과 EA 컨설팅을 기반으로 전사 아키텍처를 수립하고, 개선 과제를 도출해 차세대 프로젝트의 로드맵을 만들었다. 이런 모든 일정은 쉬는 기간 없이 연차적으로 이뤄졌다.
프로젝트 사업자를 선정하는 과정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현대증권은 주사업자를 선정할 때 다른 증권사처럼 통합 발주(턴키 계약)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프로젝트 전체 주도권을 자체 조직이 유지하기 위해 전략수립과 분석 설계, 품질관리, 심지어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 구매까지 직접 진두지휘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주사업자는 개발 작업만 전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현대증권의 SI개발 업체 선정에는 총 5개 업체가 경합을 벌였고 우여곡절 끝에 티맥스소프트가 최종 선정됐다.
한동우 현대증권 차세대시스템부 부장은 “조직 구성원의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제안서에 자체 인력을 70% 이상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며 “당시 대형 SI 업체는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 많아 인력 수준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티맥스소프트는 대우증권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검증된 조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프로젝트 수행 실적과 인력 소싱 등 건건이 직접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오히려 통합 발주 방식에 비해 투입 인력의 수준을 보장할 수 있었고 프로젝트 예산 사용처가 명확해져 관리가 수월했다”고 말했다.
현대증권은 개발 작업에 앞서 분석 설계 단계에서도 직접 인력을 챙겼다. 검증된 인력만 뽑는다는 확고한 의지로, 베테랑급 인력을 공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력서 낸 30명 중 한 명만 뽑힌다’는 소문이 업계에서 나돌 정도로 인력 구성을 까다롭게 진행했다.
현대증권 김영학 차세대시스템 PMO팀장은 “현대증권 내부적으로도 10년 전에 원장이관 했던 멤버가 주축이 돼서 차세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며 “그동안의 경험을 충분히 차세대 시스템에 반영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창사 이래 최대 프로젝트 = 현대증권 차세대 프로젝트는 투자 규모나 개발 범위 면에서 창사 이래 최대였고 다른 증권사의 차세대 프로젝트보다 그 범위가 넓었다. 현대증권은 차세대 시스템 구축과 함께 통합위험관리시스템, 고객자산관리시스템, 통합 상품관리시스템, OTC파생백오피스시스템, 전사 EDW 시스템, 소액결제시스템, 선물중개시스템, 퇴직연금자체관리시스템 등을 동시에 추진했다. 차세대 시스템 가동과 자본시장법 발효가 겹치고 이에 따른 단위 시스템 구축이 차세대 프로젝트에 모두 포함되면서 이처럼 프로젝트 범위가 넓어졌던 것이다.
실제로 현대증권보다 먼저 차세대 프로젝트를 진행한 증권사는 자본시장법을 전면 수용하지 못했다. 또 기간계 시스템은 100% 개선됐지만 정보계 시스템까지 업그레이드한 곳은 드물었다.
현대증권 이상락 차세대시스템부 BA팀장은 “대부분 증권사가 차세대 프로젝트를 하면서 기간계 시스템을 위주로 하는 것에 비해 현대증권은 정보계와 기간계를 모두 건드렸다”며 “실제로 전체 증권 업무의 80% 이상을 이번 차세대 프로젝트 과정에서 개선, 교체했다”고 말했다.
현대증권은 개발 범위가 워낙 넓어 단계적으로 개통하는 방안도 고려했다. 하지만 증권업의 특성상 단계적 개통이 더 까다롭고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에 결국 빅뱅방식을 택했다.
이들은 초기 프로젝트 진행에 앞서 ‘차세대’ 용어 사용 논란도 있었다. 그 당시 대우증권이 시스템 버전을 업그레이드한다는 차원에서 차기 시스템이라 명명했고, 대신증권은 자바 기반으로 전환한다는 계획 하에 차세대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한동우 차세대시스템 부장은 “현대증권은 기술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차세대’로 하는 것에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며 “하지만 시스템 관점이 아니라 비즈니스 관점에서 접근을 했을 때 분명히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결국 ‘차세대’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개발 작업 일정에 차질=차세대 프로젝트가 본격화되자 당초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불거졌다. 개발을 눈앞에 두고 개발 작업의 핵심 인력을 인수받지 못한 것이다. 당시 대우증권 차세대 개발에 티맥스소프트 개발 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 대우증권 차세대 프로젝트가 한 달가량 연기되면서 개발자들이 제때 참여하지 못했다. 1월에 참여하기로 한 인력이 2월 말로 연기되면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여기에 실제 구현에 앞서 기존 분석 설계 내용의 갭(gap) 분석 작업이 필요했다. 현대증권이 자체적으로 분석, 설계한 부문의 검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작업이 사실상 한 달 정도 소요되면서 실제 개발 구현단계의 일정은 당초 계획했던 5개월에서 4개월로 줄어들었다.
김지홍 티맥스소프트 금융EA3사업부 상무는 “초기 개발 일정에 차질이 있었지만 경험 있는 인력을 대폭 늘려 초기 계획했던 일정에 맞춰 개발 완료했다”며 “일정관리와 진척관리 등 프로젝트 관리를 철저하게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현대증권은 각 프로젝트 담당 개발자들에게 개발할 프로그램의 할당량을 명확히 했다. 철저히 실적위주로 운영했기 때문에 개발 작업을 빨리 끝낸 사람은 퇴근도 자유로웠고, 그만큼 성과도 높았다.
또 주사업자가 아닌 현대증권이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기 때문에 제도 변경 시에도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의 변경 관리를 미리 만들어 프로세스를 정립했다. 이런 과정들이 프로젝트 일정을 준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픈 3주 전, KRX 차세대 오픈 연기=테스트 작업이 한창 마무리 단계에 왔을 즈음, 증권업계는 또 한 번 떠들썩했다. KRX 차세대 시스템 개통일이 1월 28일에서 3월 23일로 연기된 것이다. 2년 넘게 KRX 차세대 오픈 일정에 맞춰 달려온 현대증권은 한순간 맥이 풀렸다.
박선무 현대증권 상무(CIO)는 “집중력이 고도화된 시점에서 개통해야 하는데 갑자기 일정이 연기되면서 CIO로서 참으로 곤혹스러웠다”며 “연기된 일정에 따르는 비용 부담을 줄이는 것과 함께 지친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현대증권 측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정 연기가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 여겼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만큼 그동안의 프로세스를 다시 점검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것이다. 이로써 현대증권은 8차로 계획됐던 전 지점 테스트를 6차례 더 늘려 테스트 작업의 완성도를 높여 나갔다.
김영학 PMO팀장은 “초기 테스트 단계에서 데이터 오류율이 11% 정도 나왔으나 마지막 차 테스트에서 0.2% 미만으로 나왔다”며 “사실상 테스트 작업이 길어질수록 현업의 참여도가 떨어지게 마련인데 끝날 때까지 직원 1000명 이상이 항상 참여했던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말했다.
현대증권 측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1월 말 오픈 시점에도 데이터 오류율은 0.35%로 나왔다. 내부적으로 0.5% 미만이면 시스템 오픈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이미 차세대 시스템의 신뢰도는 개통 전부터 내부적으로 확보된 셈이다. 특히 차세대 프로젝트를 이미 진행한 다른 증권사들이 2∼4차례 연기했건 것에 비해 현대증권은 타의에 의한 일정 연기가 있기는 했지만 오픈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한 유일한 증권사로 현재까지 남게 됐다.
◇2년 여정의 종착점 ‘D데이’=2009년 3월 23일 오전 6시. 공식 개통은 7시지만 다소 앞당겨 운용을 시작했다. 드디어 2년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종착점에 도착하는 순간이다.
현대증권 차세대시스템부는 테스트 하루 전날인 일요일에도 30분간 비공식적으로 차세대 시스템을 운용해 예행연습을 마쳤다. 그렇지만 직원들은 본 가동에 앞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긴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상황실에는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과 정성수 부사장도 함께했지만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며 종합상황판을 주시했다.
한동우 차세대시스템 부장은 “개통 당일 모든 현대증권 직원들이 숨죽인 채 기도했다”며 “특히 차세대시스템부의 일부 직원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어서 영업점에 일찍 출근해 계좌도 만들어 보고 개인연금도 들면서 초조함을 달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현대증권의 차세대 시스템 오픈 첫날 주문건수는 32만4409건, 전체 트랜잭션처리건수는 1484만4081건을 기록했다. 평소와 비슷한 수치를 보였다. 고객이 느낄 만한 장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안정적으로 운용됐다. 때마침 종합주가지수도 28.56포인트 올라서 1199.50을 기록해 기쁨을 배로 느꼈다.
현대증권은 가동한 지 일주일 만에 상황실을 철수했다. 그리고 곧바로 ‘차세대 시스템의 안전이행 완료’를 선언하며 프로젝트를 최종 완료했다. KRX 차세대와 동시 개통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출발했던 현대증권 차세대 프로젝트. 그만큼 업계의 우려도 많았던 터라 더욱 의미 있는 프로젝트로 회자된다.
◆인터뷰-현대증권 한동우 차세대시스템부 부장
“일은 시스템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사람이 판단하고 정리하는 것이기에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합니다.”
현대증권 차세대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현장에서 직접 진두지휘한 한동우 부장의 말이다. 한 부장은 “500명 이상의 인력이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인만큼 구성 인원과 구성원 간의 단합이 가장 중요한 성공 포인트”였다며 “만약 티맥스소프트 인력으로 100% 들어오지 않았다면 프로젝트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년 넘게 진행된 프로젝트 기간 동안 인력 이동은 10명 미만으로 나타났다. 현대증권은 차세대 프로젝트 인원을 구성하는 데 만전을 기했던만큼 인력 관리에도 남다른 신경을 썼다. 현대증권은 자체 인력과 외주 인력을 가리지 않고 모든 프로젝트 참여자에게 동일한 근무 환경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 부장은 “티맥스소프트 직원이나 현대증권의 직원이나 똑같이 대우했다”며 “갑과 을의 관계를 없앴다”고 말했다. 그는 한 예로 책상 사건을 들었다. 현대증권 총무부에서 외주 직원의 책상 크기를 놓고 작은 것을 써야지만 같은 층에서 다 같이 쓸 수 있다고 했다. 이에 한 부장은 현대증권 직원 책상까지도 줄여서 똑같이 작은 것으로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한 부장은 “조직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되면 인간의 특성상 단합이 어려워진다”며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은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시스템 운용 조직도 차세대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IT 부서 내에서 차세대 개발 조직이 신설되면 기존 시스템을 운용해야 하는 조직과는 상극이 된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기존 운용조직이 차세대 시스템의 IT 검증 테스트를 하도록 권한을 줬다.
한 부장은 “운용 조직 입장에서는 기존 시스템 운용과 함께 개발 작업들을 검증해야 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희생이 따랐다”며 “하지만 그만큼 차세대 시스템을 자기 일처럼 여겼고 열정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