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스타기업’인 삼성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최근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 수출 경제의 주역인 반도체 기업이 저조한 시황 지속으로 D램·낸드메모리 가격이 급락하면서 적자 구조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수한 기술 및 원가 경쟁력 덕분에 양사는 세계 경쟁 업체 대비 적자 폭이 적지만 메모리 수요 회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력으로 흑자 구조를 달성하기에 힘이 부친다.
이에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산업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반도체 산업의 미래 발전 방안을 놓고 민관이 다시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반도체 강국론은 메모리에만 국한된 얘기일 뿐 세계 반도체 물량의 80%를 차지하는 아날로그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서다. 경기침체 속에서도 안정된 성장률을 보이는 ‘아날로그 반도체 산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아 시스템 산업 미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다.
◇한쪽 날개에만 의지한 반도체=1983년 삼성의 도쿄 선언 이후 2008년까지 25년간 우리나라는 ‘반도체 신화’를 써내려왔다. 삼성·하이닉스는 메모리 개발 경쟁에 뛰어들어 ‘세계 최초’ 타이틀을 단 메모리 개발 성과를 쏟아냈다. 삼성·하이닉스는 작년 D램 시장 점유율 49.6%, 낸드메모리 54.4%를 기록했다. 세계 세트 업체에 공급하는 메모리 두 개 중 한 개꼴로 한국산 제품이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그동안 과감한 설비 투자, 수십년의 공정 경험, 첨단 기술 개발로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며 맹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메모리 경기 불황은 삼성에조차 4분기 적자를 안겨줬다. 2000년 3분기 이후 반도체 사업에서 처음 적자를 냈다. 또, 반도체는 작년 경기 불황으로 전년 대비 16.0% 감소한 328억달러어치를 수출, 휴대폰에 수년간 지켜온 IT 수출 1위 자리를 내줬다.
소품종·대량 생산 방식의 메모리 산업에 과도하게 편중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을 다품종·소량 생산 방식의 시스템 반도체로 이동해야 한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산업 발전이 균형을 이뤄야만 한국 반도체 산업이 현재 위기를 탈피해 선순환 구조를 띤다는 지적이다.
◇시스템 산업 핵심 ‘아날로그’= 아날로그 반도체 등 시스템 반도체 산업은 단지 반도체 산업뿐만 아니라 휴대폰·가전·자동차 등 대형 시스템 산업의 궁극적인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휴대폰·자동차 등 시스템이 디지털화되고 고성능을 발휘할수록 해당 시스템의 효용성을 높이고자 수많은 아날로그 반도체들이 시시각각 움직이고 있다. 즉, 아날로 반도체는 자연(아날로그세상)과 기계(디지털 세상)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의 80%를 차지하는 시스템 반도체 중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은 작년 기준으로 연간 450억달러에 이른다. 메모리(470억달러)와 규모가 비슷한 대형 시장이다. 인텔·TI는 올 1분기 최근 실적 발표에서 각각 6억4700만달러와 1700만달러 이익을 기록, 메모리 업체와 달리 안정세를 보였다. 아날로그 반도체는 메모리와 달리 라이프 사이클이 길어 시장이 안정적이다.
그러나 국내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은 취약하다. 작년 무역 적자 규모는 전년 대비 10% 더 증가한 68억달러 이상에 달했다. 국내 기업은 작년 11월 말 기준으로 시스템 반도체를 124억5900만달러 수출한 데 비해 192억5800만달러를 수입,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스템 반도체 수출 규모는 전년 대비 4% 감소했으나 수입 규모는 0.04% 감소, 국내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취약했다.
◇아날로그를 신성장 동력으로=아날로그 반도체 진입 장벽은 매우 높다. 하지만 핵심 기술 인력과 검증된 생산 인프라의 경쟁력을 갖추면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가 충분히 승부를 걸 만한 분야다. 메모리처럼 나노급 공정 능력을 갖춘 대규모 생산 라인보다는 아날로그 제품을 설계하고 신뢰성이 검증된 소자와 공정기술, 안정된 설계 환경, 우수 엔지니어 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반도체는 0.18∼0.5㎛ 팹 공정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날로그 공정 기술 기반을 구축해놓고 있어 민관이 인력 양성 등의 역량 강화에 좀 더 집중하면 아날로그 분야에서 스타 기업을 배출할 수 있다. 실제로 정부와 동부하이텍이 2005년 개발한 BCDMOS 공정 기술은 TSMC·UMC 등 선두 파운드리 보다 앞선 세계 수준의 공정 기술로 우리나라는 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기반을 이미 구축했고 실리콘마이터스 등 기업이 아날로그 제품 상업화에 잇따라 성공했다.
권오경 한양대 교수는 “현재 아날로그 반도체 산업은 태동 단계에 진입했다”며 “중장기 관점에서 아날로그 전문 인력을 집중 양성하는 등 아날로그 반도체 성장을 위해 팹리스·파운드리·세트업체 등의 협력뿐만 아니라 정부·학계도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안수민기자 smahn@etnews.co.kr
◆용어설명
아날로그 반도체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빛·소리·압력·온도 등 자연계의 각종 아날로그 신호를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는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또 컴퓨터 연산결과를 사람이 인식하도록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 주기도 한다. 디지털 기기의 입출력 인터페이스, 전력관리, 신호 감지·증폭 등에 사용된다. 주로 전원을 공급하고 제어하는 파워매니지멘트(PM) IC, 교류와 직류를 전환해주는 AC/DC 컨버터와 DC/AC 컨버터, 고주파(RF) 반도체, 고선명 LCD 패널에 사용되는 LED 백라이트유닛 IC 등이다. 한편 시스템반도체에는 아날로그, 로직,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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