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디자인에서 삼성 돌풍을 불러일으킨 주역 ‘보르도 LCD TV’. 이 제품이 ‘빅 히트’할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모습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이던 기존 TV 시장에 과감하게 와인잔 모양의 오각형 TV를 내놨다. 보르도 LCD TV는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성공한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디자인에 대한 성공담만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국내 한 중소기업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성의 보르도 LCD TV는 성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삼성전자는 당시 혁신적인 모습의 보르도 TV를 설계했지만, 디자인을 구현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보르도 TV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초정밀 금형기술인 ‘웰드리스 스팀몰드’를 일본 회사만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업체들은 기술유출을 이유로 TV 외관을 찍어내는 금형틀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보르도 TV 디자인의 핵심 기술이 금형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신뢰관계가 구축되지 않은 일본기업과 불안정한 납품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품질관리에 골치를 앓는 것도 물론이었다.
고심 끝에 삼성전자는 32년간 거래하며 신뢰를 쌓아온 제일정공에 도움을 요청했다. 공동 기술개발 제안과 함께 스팀몰드 기술이 완성될 경우 안정적인 납품물량 구매를 약속했다. 제일정공은 삼성전자를 믿고 선뜻 기술과 디자인 개발에 착수했다. 삼성전자는 무이자 대출이 가능한 설비구입 자금을 5년간 10억원씩 지원했고, 회사 기술자 5명을 일본에 연수 보내주기도 했다. 마침내 두 회사는 스팀몰드 자체 제작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아크릴 시트와 후가공 삭제로 218억원의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또 보르도 TV의 세련되고 고급스런 외관 디자인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제일정공은 그해 매출액 92억원에서 이듬해 120억원대로 성장했다. 물론 삼성전자와의 거래량은 80억원에서 120억원으로 증가했다.
대당 1억원의 고부가가치 금형기술 확보는 보너스였다. 합성수지 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스가 TV표면에 자국을 남기는 것을 막기 위한 가스빼기 기술은 오히려 일본으로 역수출하는 성과도 일궜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