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경기위축으로 대기업들이 경비절감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금융·통신 등 정보기술(IT) 최대 수요처가 몰려 있는 금융·통신 분야 대기업들이 비용절감을 목표로 최근 들어협력사에 최저가 입찰을 유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낙찰률이 예정가격에 비해 무려 50%대로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됐다. 원가조차 맞출 수 없는 가격으로 발주되면서 하도급업체인 중소 IT업계는 생존권마저 위협받고 있다.
2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KTF가 긴축경영에 나서면서 최근 진행한 이동통신 중계기 10개 품목입찰 평균가격이 예정가격(341억원)의 64%인 218억원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0개 품목 중 예가의 50%대로 낙찰된 품목도 3개에 달했으며, 60%와 70%대가 각각 4개, 2개인 것으로 알려졌다. 1대당 700만원 후반대에 납품 중인 제품이 500만원으로 무려 200만원 이상 깎였다. 부품가격도 못 건진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금융업계 ‘슈퍼 갑’으로 꼽히는 우리금융그룹도 최근 서울 상암동 IT 센터 구축 및 이전사업의 IT 기반 환경 구축 부문 입찰을 의도적으로 유찰시킨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업은 삼성SDS, LG CNS, SK C&C 등 IT 서비스업체 3사가 입찰에 참여한 가운데 지난 23, 24일에 이어 27일까지 계속 유찰돼 28일 오후 재입찰에 들어가 LG CNS가 수주했다. 1단계 기술평가를 통과한 3개사를 대상으로 최저가 입찰 방식으로 진행했지만 우리금융 측이 원하는 가격대와 많은 차이를 보여 유찰이 반복됐다. 125억원 규모의 사업이 3일간 이어진 유찰로 80%대 초반에서 낙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최저가 입찰이 횡행하는 것은 경기위축으로 민간 부문 IT 투자가 급감하면서 수주경쟁이 가열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슈퍼 갑인 발주업체들도 위기 속 경영합리화를 내세워 최저가 입찰을 밀어붙이면서 출혈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업계는 금융·통신권이 산업 선순환을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최저가 입찰에 몰두, 결국 하도급업체인 중소 IT 업체들의 출혈로 이어져 프로젝트 부실 자체로 귀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 국산 장비업체들이 고사 위기로 내몰리면서 어렵게 육성해온 장비산업 자체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소 SW 업체 한 사장은 “그동안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공공 부문에서는 SW 분리발주 제도를 만들었는데, 민간 부문은 이런 제도도 없어 중소업체들에는 직격탄이 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중소 장비업체의 한 사장은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이 다른 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라며 “IT 산업계에 시장의 순기능이 파괴되면 국산 장비업체의 연쇄적인 파산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금융기관과 통신사업자 측은 “어려워진 경영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서 “장비업체들도 경영합리화로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데 발주사에만 책임을 돌리는 건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홍기범·이호준기자 kbho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