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헤드헌터에게 문의하면 서럽더라도 버티라며 만류한다.”(다국적 IT 기업 A사 임원)
“구조조정으로 퇴사한 후 다른 다국적 IT 기업에 문을 두드렸지만 ‘감원’만 있고 ‘충원’은 없어 결국 비IT 기업에 취업했다.”(다국적 IT기업 B사 전 직원)
다국적 IT 업체에 일하는 직원들이 감원 ‘쓰나미’에 밀려 쓸쓸히 업계를 떠나고 있다. 그간 우리나라 IT 산업 발전에 알게 모르게 기여했지만 외국계 기업이라는 ‘색안경’으로 인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이들은 최근 외국계 기업이 구조조정을 위해 가장 손쉽게 선택하는 감원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구조조정 칼바람=지난해 하반기부터 글로벌 IT 기업의 구조조정이 시작된 이후 한국 지사에도 예외 없이 감원 조치가 이어졌다.
한국HP·한국MS·한국썬·한국후지쯔·한국유니시스 등 내로라하는 기업 대부분이 감원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회사마다 적게는 10∼20명에서 100명에 가까운 직원이 퇴사했다.
구조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재취업도 쉽지 않다. 그간 쌓은 역량을 IT 업계에 펼쳐 새 가치를 창출하기도 전에 비IT 업계로 발을 돌리는 사례가 많아졌다. 업계 관계자는 “직원들이 외국기업에서 얻은 노하우와 경험을 한국 IT 산업 발전을 위해 활용해야 하는데 기회를 찾지 못해 사장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외로운 ‘IT 코리언’들=다국적 IT 업계 직원들은 한때 높은 연봉과 우수한 복지조건 때문에 국내 기업 직원들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동시에 받았지만 이젠 옛말이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다국적 IT 기업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후 최근 공공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김모씨(42)는 “다국적 기업 직원들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오직 본사에 보고하는 ‘숫자’만으로 평가를 받아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임금과 복지 조건 모두 악화된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미국계 IT 기업들이 본사 감원 대상 직원들을 개발도상국으로 파견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한 회사의 한국법인 노조 홈페이지에 “우리도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는 중국으로 가라고 하겠지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지난해 말부터 구조조정설이 나돌다가 최근 대규모 감원이 이뤄진 기업의 한 직원은 “수개월 전 감원 얘기가 나온 이후 많은 직원이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며 “소문대로 많은 동료가 퇴사하자 허탈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한국법인도 속 탄다=무엇보다 한국법인이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통상적으로 감원에 앞서 비용 절감과 수익성 개선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는 것과 달리 한국법인은 본사에서 내려온 감원 조치를 최우선적으로 실행한다. 다국적 기업은 대부분 현지 법인의 1인당 매출과 비용을 기준으로 감원 규모를 정한다. 지난해 한국법인들은 원화 기준 매출이 나쁘지 않았지만 원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달러 기준 매출은 크게 떨어졌다. ‘달러’ 수치만을 바라보는 본사는 별다른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한 다국적 IT 기업은 이 때문에 노조와 마찰을 빚고 있다.
다국적 IT 기업의 인사관리(HR) 담당 임원은 “본사 차원에서 정해진 정책에 맞춰 감원을 해야 해 한국법인에서 자체적으로 감원정책을 조정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다국적 IT 기업 5개사 노조가 속한 전국IT산업노조연맹의 승민 정책부장은 “다국적 IT 기업도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본사 방침이라는 일방적인 논리만을 앞세우기보다 더욱 장기적인 시각 아래 신중하게 감원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