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와 통상 문제로 비화돼 재검토에 들어간 행정기관용 인터넷전화(VoIP) 국산 보안모듈 탑재 의무화 조치가 외교·안보 부처를 제외한 다른 행정기관에서는 사실상 백지화될 전망이다. 그동안 공공 시장을 겨냥해 국산 보안모듈 ‘아리아’를 탑재한 단말기와 통신장비를 개발해온 국내외 업체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10일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통상문제를 고려해 재검토한 국산 보안모듈 의무화 조치는 외교안보 라인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도입하기 힘들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며 “외교안보 라인의 범위를 놓고 막바지 논의가 한창”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외교통상부·국방부·통일부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정부 부처에서는 인터넷전화에 국산 보안모듈 탑재가 의무화되지만 다른 부처에서는 국제표준인 ‘AES’가 보안모듈로 채택될 전망이다.
국정원은 당초 인터넷 선을 이용하는 VoIP는 해킹을 통한 도·감청 문제가 있는 만큼 공공기관 도입시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한 암호모듈 ‘아리아’를 의무적으로 탑재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시스코·어바이어 등 미국업체들은 아리아 대신 미국이 개발해 국제표준으로 인정받은 암호기술인 ‘AES’ 사용을 요구하고 미 무역대표부도 이를 통상문제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전면 재검토해 왔다.
국정원이 국산 모듈 의무화를 외교안보 라인에 국한한 것은 이를 고려해 ‘조달기관이 정하는 기술규격은 국제표준에 따라야 하되 국가 안보분야는 예외로 한다’는 세계무역기구(WTO) 조항에 맞춘 절충안이라는 평가다.
하지만 삼성전자·LG노텔·다산씨앤에스 등 국내 10여개 업체는 많게는 수십억원의 개발비와 수십명의 인력을 투입해 아리아를 탑재한 전화기와 통신장비를 개발한 상태여서 아리아 도입 범위가 외교안보 라인으로 축소되는 것에 크게 반발할 조짐이다.
국내업체 한 관계자는 “일본의 경우 이미 ‘카멜리아’라는 독자 암호모듈을 개발해 국가 안보부처가 아닌 일반 행정기관에도 도입 중”이라며 “외교안보 라인에만 국산 암호모듈을 사용하라는 것은 미국 압력에 굴복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외교안보 라인에만 국한되더라도 국산 모듈을 의무화하면 이 시장 진입을 위해서는 아리아 기반 단말기와 장비를 개발해야 하지 않느냐”며 “일반 행정기관에서 AES 기반으로 사업을 발주하더라도 AES는 물론이고 아리아까지 호환되는 장비로 수주전에 뛰어들 수 있어 비교우위를 가질 수도 있다”고 해명했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국정원의 국산 보안모듈 의무화 범위가 확정되면 이에 맞춰 15억원의 예산을 들여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유선전화를 요금이 저렴한 인터넷전화로 바꿀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중앙청사를 시작으로 지자체를 포함한 전국 9000여개 공공기관이 인터넷전화를 도입하면 시장 규모는 400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장지영·정진욱기자 jya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