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막장 코드

[이머징 이슈] 막장 코드

요즘 드라마, CF, 노래 할 것 없이 독하고 극단적인 표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른바 막장 코드, 막장 마케팅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죽했으면 광업공사에서 막장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경고했을까. 극단적인 자극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회 풍조를 두고 불황기마다 되풀이되는 일시적 유행 또는 미디어 과잉에 따른 항구적 트렌드라는 상반된 분석이 나오고 있다. 막장코드는 과연 한국사회에서 독하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지난 3월 25일 TV를 보던 시청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원 세상에 개고생이라니. 지상파 방송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광고카피가 TV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대형광고가 대부분 그렇듯, 이번 광고도 티저로 시작됐다. 변우민, 엄홍길 등 유명 배우와 유명인이 등장해 산에서 눈바람을 맞으면서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점을 몸으로 재현했다. 개고생이라는 카피가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어쨌든 이 광고는 대박을 치며 모든 관심이 광고를 만든 회사에 집중됐다. 시청자는 또 한 번 놀랐다. KT가 광고주라니. 그 점잖은 기업이미지를 지닌 국내 1위 통신기업이 저런 CF를 내보냈다고.

 이 광고는 KT의 신종 통합 브랜드 ‘쿡(QOOK)’을 홍보하기 위한 이미지 CF였다. 부담스러울 수 있는 막장 코드가 사용됐지만 일반인에게 쿡이라는 브랜드를 최단 시일 내 인지시키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그간 KT가 만들어 낸 메가패스와 같은 여타 브랜드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KT사례에서 볼 수 있듯 요즘 막장이 대세인 것은 분명하다.

 유행가 노래 제목도 ‘총 맞은 것처럼’ ‘사고치고 싶어’처럼 더욱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바뀌어가는 추세다. TV에도 막장이라는 말이 하루에도 수십 번 등장한다. KBS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개콘)’의 인기 코너 ‘독한 것들’을 보자. 다섯 명의 개그맨이 나와 이렇게 외친다.

 “내가 오늘 독설을 할거야. 그래서 너희가 가진 여자 친구에 대한 환상을 다 깨버릴거야.”

 이내 그들은 예쁜 척하는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남자들의 겉치레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과거 같았으면 거부감을 느꼈을 코너지만 지금 개콘에서는 떠오르는 샛별이다. 시청자도 막장 코드에 열광한다. 남이 아닌 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데도 거부감이 아닌 환호로 답한다.

 KBS의 ‘박중훈쇼’가 조기 종영된 것도 막장 코드로 설명된다. 시청자는 게스트 처지를 헤아려 점잖은 질문만 던지는 박중훈쇼보다는 신랄한 리얼토크쇼를 선호했다. 웬만한 자극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는 세태의 희생양인 셈이다.

 KT의 광고 성공도 마찬가지다. 개고생이라고 직설적으로 내뿜는 포스에 일반인은 열광한다. 내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해줬다는 대리 심리다.

 막장 코드는 일반인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키는 데 아주 유용한 광고 기제다. KT 광고가 일반인의 관심을 많이 끌었던 이유는 ‘막장 코드’를 차용한 탓이 크다. 특히 광고가 변우민이 출연한 ‘아내의 유혹’ 장면을 그대로 쓰면서 일반인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졌다. 얼마 전 종영된 아내의 유혹은 막장 드라마의 줄임말인 ‘막드’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켜며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찬사를 받았다.

 아내의 유혹이 인기를 끌었던 큰 요인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제작진은 빠른 전개를 바탕으로 한 튀는 감정선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막장이라고 욕하면서도 보는 드라마, 그것이 바로 아내의 유혹이었다. 당시 SBS 시청자 게시판은 아내의 유혹을 놓고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좋아하거나 욕하는 사람 모두 매일 저녁 7시면 아내의 유혹을 보기 위해 TV 앞에 앉는다는 것이다.

 KT가 ‘쿡(QOOK)’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브랜드 대표 이미지로 막장을 내세운 건 결코 아니다.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이를 썼을 뿐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 어머니가 주로 했던 말이지만 사실 개고생이라는 말이 광고에 등장하기는 쉽지 않았다. KT는 KTF와 합병을 계기로 미래 유무선 통합과 방통 융합을 주도할 혁신적 브랜드가 필요했다. 100여일의 짧은 작업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QOOK’이었다.

 브랜드를 만들고 나니 광고가 걱정이었다. 이른 시일 내에 브랜드를 띄워야 했다. KTF와의 합병을 상반기에 마무리짓기 원하는 경영진의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막장 코드다.

 입소문을 내려면 막장처럼 강한 흡입력을 가진 코드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독한 놈이 필요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카피의 출발점은 집이라는 공간을 집 밖에서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하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은 집 밖에서 집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누구나 쉽게 알고 공감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였다. 제작회의 과정에서 농담삼아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면 더 재미있겠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처음엔 부정적이었다. 강한 어투와 비속어로 치부돼 묻힐 뻔했다. 그러나 실제로 확인해 보니 개고생이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표준어가 아닌가. 모두 총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티저 광고다운 새로움과 파격을 전달하기 위해 최종 카피로 결정하게 됐다. 쿡 브랜드를 만든 신훈주 KT 코디는 “개고생이 통과가 안 될 경우 생고생으로 카피를 잡으려 했다”며 “아마 생고생이었으면 지금처럼 센 느낌이 안 났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한 놈들은 끝까지 남는다?

 다변화한 매체가 폭탄처럼 수많은 프로그램과 정보를 쏟아내는 가운데 소비자는 계속해 더 새롭고 더 재미있는 것을 요구한다. 어쨌든 지금은 웬만한 자극으로는 소비자를 울리거나 웃길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난해 말부터 현재까진 막장 코드가 시장에 먹혀들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랑, 가족 등을 강조하는 부드러운 광고가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180도 변했다. 전문가들조차 막장 코드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막장 마케팅의 수명이 어디까지인지 하는데 있다.

 막장 코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광고 컨셉트는 불과 한 주 사이에 변하기도 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사회가 혼란할 때는 항상 극단적이고 튀는 코드가 인기를 끌었다. 1980년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은 대중을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에 몰입하게 하는 ‘3S정책’을 본격화했고 각종 대중문화는 1970년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야해졌다. 하지만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요즘 시각에서 1980년대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야한 영화들을 보면 그 유치함에 코웃음이 나올 정도다. 독한 자극에 무덤덤해진 대중들이 막장을 더 이상 센 놈으로 느끼지 않는 순간 막장코드의 생명력은 끝난다. 막장 코드를 차용한 KT광고도 이번에는 시장에 제대로 먹혀들었지만 지속적인 트렌드로 치부하기는 이르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막장 코드가 분명 이른 시일 내 브랜드를 시장에 내려놓는 데는 좋지만 계속해서 사용할 도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기업, 제품=막장’이라는 인식이 성립되면 매출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막장이 흡입력이 좋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매출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망했습니다. 80% 파격세일’과 같은 독한 광고문구는 본질적으로 생명력이 매우 짧다. 막장 코드를 내세운 회사도 일정 수준의 성공을 거둔 뒤 관련된 저급한 이미지를 성급하게 지워버린다. 이 과정을 극복하지 못하면 초기 시장 진입 이후 엉뚱하게 상황이 진행되곤 한다.

 비록 KT가 개고생이라는 막장 코드로 재미를 봤지만 그 흔적을 지우는 데 적지 않은 부담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KT처럼 브랜드를 갖춘 선발업체가 아니라 시장에 초기진입하려는 후발업체들의 입장에선 일단 관심을 끌고 보는 막장 코드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어렵다.

 김성철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는 “불황에는 결과를 빨리 내야 하기 때문에 KT로선 막장 코드를 선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면서도 “세상 일이란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한 가지 흐름 만이 지속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막장코드의 유행 속에서도 워낭소리와 같은 때묻지 않은 순수코드의 문화상품이 인기를 끄는 반대 흐름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획사에서 만든 아이돌 그룹의 섹시한 춤 동작도 인기를 끌지만 장기하와 얼굴들, 촌스러운 아줌마 수전 보일의 UCC에 대중이 열광하는 심리적 배경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마케팅 전문가는 막장 코드가 브랜드를 포장하는 기술일 수는 있지만 본류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어려운 상황이 세상의 모든 천박함을 용서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고객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마케팅 담당자들의 고민은 커져만 간다. 우리 회사도 한번 막 나가볼까.

배일한·한정훈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