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2006년 서비스지향아키텍처(SOA)가 국내에 처음 소개됐을 때만 하더라도 많은 전문가들은 SOA가 기업 IT인프라를 획기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련 솔루션 업체들은 1∼2년간의 초기 도입기를 거쳐 이후 본격적인 SOA 확산기가 올 것이라며 큰 기대를 나타냈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SOA 개념을 활발하게 도입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SOA를 접목한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 주요한 근거였다. 그리고 3∼4년이 지났다. 여전히 많은 솔루션 업체와 기업 IT 전문가들은 SOA가 중요한 트렌드이자 지향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요란했던 SOA 마케팅은 슬그머니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아직 SOA는 다분히 마케팅 개념이라는 주장, 혹은 SOA가 다시금 주목받을 것이라는 주장 등 극명한 의견대립이 남아있 을 뿐이다. 과거처럼 SOA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사라졌지만 대형 신시스템을 고민하는 기업들은 여전히 SOA를 검토하고 고민한다. 그리고 SOA 시장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엔터프라이즈서비스버스(ESB)는 기존 엔터프라이즈애플리케이션통합(EAI) 시장을 상당 부분 대체해 나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직 일부긴 하지만 SOA를 적용한 신시스템들도 순차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SOA는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물밑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는 것일까.
경영 환경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기업 간 경계를 넘어서는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기업 IT인프라의 유연성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 출시된 새 상품과 서비스는 무려 10배 가까이 증가한 상태다. 치열해지는 경쟁환경으로 인해 변화에 대한 민첩성도 중요한 요소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사일로(silo)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 정보시스템 환경은 이런 요구를 수행하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많은 기업이 끊임없이 ‘차세대’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SOA는 상호운용성과 재사용성을 기치로 내걸었다. 기업 IT인프라의 최종 지향점이라는 환호를 받으며, 지난 몇 년간 SOA는 기업 IT전략가들의 핵심 화두 중 하나로 자리 매김했다.
◇대부분 상호운용성 위해 SOA 도입=지금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대부분의 SOA 구축 프로젝트는 상호운용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목표였다. 물론, 상호운용성과 재사용성은 별개의 이슈가 아니다. 상호운용성이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재사용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기업이 미래의 재사용성 기대보다는 당장의 상호운용성을 위해 SOA를 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차세대시스템을 개통한 하나은행도 상호운용성을 위해 SOA를 도입한 사례다. 하나은행은 ESB를 이용해 고객접점의 채널과 고객관계관리(CRM), 상품처리시스템 등 백엔드시스템을 연결했다. 이를 기반으로 하나은행은 멀티채널이벤트처리 업무 11개 프로세스에 SOA를 적용했다.
오는 6월 29일 가동에 들어가는 차세대시스템에 SOA를 적용한 KTF도 고객업무 처리를 담당하는 대외계 부문과 기존의 CRM, 빌링시스템을 연계하는 데 ESB를 적용했다. KTF는 이번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비즈니스 환경 변화에 따라 시스템 변경 시마다 51개 외부 기관과 접점 시스템을 모두 변경해야 했던 지금까지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고객 응대가 빨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대표적인 SOA 사례로 손꼽히는 행정안전부 온나라시스템도 부처 간 업무 수행 내역을 실시간 공유하기 위해 SOA를 도입한 사례다. 이를 위해 행안부는 중앙 정부의 웹서비스저장소(UDDI서버)와 다른 기관의 UDDI서버를 연계했다. 또 정부 내 8개 범정부 유관시스템과 서비스 기반의 연계 기능도 구축했다.
이 외에 현대자동차가, 삼성전자가 글로벌 전사적자원관리(ERP)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해외 법인 간 대량의 엔지니어링 데이터 공유 및 협업 지원을 위해 기존 시스템과 해외 시스템을 연계하는 데 SOA를 적용했다. 이 밖에도 LG전자가 ERP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LG화학이 비즈니스프로세스관리(BPM)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SOA를 도입했다. 모두 구매 프로세스에 적용된 사례다.
문병선 삼성SDS 책임은 “그동안 SOA는 채널과 백엔드시스템을 연계해주는 부분에 적용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적합하다는 인식이 많았다”면서 “이로 인해 초기 SOA 도입 동향이 상호운용성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설명했다.
◇보험권 중심으로 SOA 전사적용 추진=모든 기업이 SOA를 특정 영역에만 적용했거나, 파일럿 프로젝트만 진행한 것은 아니다.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전사 적용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에는 보험권이 가장 앞서 있다.
동양생명은 지난 2007년 초 SOA 기반으로 차세대시스템을 구축했다. 전사 SOA를 적용한 보험권 첫 사례인 동양생명 프로젝트는 계약, 유지관리 등 보험사 핵심업무가 포함된 기간계시스템에 적용됐다. 동양생명은 당초 컨설팅을 통해 SOA 적용 서비스를 총 500여개로 분류한 데 이어, 이를 다시 140개로 추렸다. 이후 다시 현실에서 접목 가능한 서비스를 골라, 총 50개의 서비스를 SOA로 구현했다.
보험권에서는 동양생명에 이어 LIG손해보험이 작년에 착수한 차세대시스템에 SOA를 적용,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 역시 전사 업무에 SOA를 적용하는 프로젝트로 내년 완료 예정이다. 타 산업에서는 SK텔레콤이 차세대시스템 구축 후 ERP 시스템 고도화에 SOA를 적용했다. LG텔레콤은 지난 2008년 1월 SOA를 적용한 차세대시스템을 가동했다.
윤희우 LG CNS 책임연구원은 “SOA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확대된다면, 초기 상호운용성 위주의 관점에서 재사용성 관점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며 “이는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언급했다. 장성우 한국오라클 상무도 “우선적으로 시스템 통합이나 연계가 이뤄진 후 재사용성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전사에 적용된 ‘명실상부한’ SOA 프로젝트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SOA 도입, 폭발적 증가는 없을 듯=이처럼 기업 및 기관들의 SOA 도입 사례는 과거보다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당초 예상했던 것처럼 폭발적인 증가는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여전히 SOA에 대한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또 SOA를 도입하더라도 전사에 걸쳐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김홍근 하나은행 아키텍처부장은 “향후 비즈니스 확장성을 고려하면 현재로서는 SOA가 유일한 대안”이라며 “그러나 성능이 더 우선시되는 내부 업무시스템에는 아직까지 굳이 SOA 적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SOA를 적용하면 XML 데이터 양이 커지는 만큼 처리 속도가 다소 늦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는 단 1초라도 서비스 속도가 늦어지면, 고객에게 외면받는 금융권에서 SOA 적용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보안상의 문제점도 여전히 제기되는 문제다. 인증권한 등의 보안시스템을 충분히 강화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전망도 있다. 최근 개통하거나 곧 개통될 주요 SOA 적용 신시스템들의 효과가 검증되면 SOA 시장은 다시 주목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그것이다. 특히 상호운용성 위주에 머물던 기존 고객들이 SOA를 타 업무로 확대 적용하게 되면 SOA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조만간 KTF와 합병하는 KT가 머지않아 추진할 예정인 차세대시스템 구축 프로젝트에 SOA를 접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기대감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재사용성에 대한 확신을 주기까지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신혜권·성현희기자 hk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