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로 전국이 충격이 휩싸인 가운데 빈소가 차려진 봉하마을에는 정관계 인사는 물론 일반 시민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직접 조문을 검토하고 있으며 정부는 장례 형식에 대해 유가족과 협의를 진행하는 등 예상치 못한 사건에 숨가쁘게 돌아가는 모습이다. 북한도 이례적으로 서거소식을 하루만에 보도하는 등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세계 이목이 집중됐다.
◇휴일에도 끝없는 조문행렬=노무현 전 대통령 임시빈소가 차려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는 휴일인 24일에도 조문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다. 전날 오후 8시 40분께부터 유족들의 분향을 시작으로 정치인과 일반인의 조문이 시작된 이후 밤새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문했다.
24일 오전에도 전국에서 많은 조문객이 주차문제로 출입이 제한된 봉하마을 진입로를 2㎞이상 걸어서 들어와 빈소를 찾고 있다. 조문객은 마을광장 한 쪽에 마련된 방명록에 ‘편히 쉬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등을 적으며 애통해했다. 장례를 준비 중인 유가족과 참여정부 참모진은 현재 마을회관 앞 좁은 분향소를 대신할 폭 10m정도의 대형 분향소를 설치 중이다. 이날 오후부터는 이 분향소에서 조문객을 맞을 전망이다.
이날 오전 8시 40분께 세종증권 매각 비리로 구속됐다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난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 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건평씨는 노 전 대통령의 사저 쪽에서 나와 곧바로 임시빈소가 마련된 마을회관으로 들어가다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현재 심경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없이 빈소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23일 오후 서울구치소를 출발해 이날 새벽에 봉하마을에 도착한 건평씨는 노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유가족 등과 장례절차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분향소에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이택순 전 경찰청장과 김한길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도 속속 도착했다. 아직까지 장례일정과 형식 등 장례절차를 확정하지 못한 유가족과 참여정부 참모진은 “노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해 경황이 없다”며 일정 확정이 늦어지는 이유를 밝혔다.
◇이대통령, 직접 조문 검토=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3일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의 빈소나 분향소를 직접 찾아 조문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방식을 고심중인 것으로 24일 알려졌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어떤 방식이든 이 대통령이 직접 조문을 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나 빈소가 차려진 봉하마을로 갈지, 분향소를 찾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단 유가족이 장례 형식을 결정한 이후 조문 방식을 정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핵심참모는 “통상적인 경우라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직접 빈소를 찾는 게 맞겠지만 이번에는 여러가지 사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만약 봉하마을 빈소를 방문해 조문할 경우에는 영결식에 참석하는 방안과 장례기간 통상적으로 조문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중 정정길 대통령실장 주재로 관계 수석비서관 회의와 전체 수석비서관 회의를 잇따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전날 밤늦게까지 정 실장 주재로 관계 수석회의가 열렸으나 이 대통령의 조문 방식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전날 오후 노 전 대통령 시신이 안치된 양산 부산대병원을 방문했던 정 실장과 맹형규 정무수석은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 조문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에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청와대는 이날 모든 일정을 취소하는 등 ‘근조 모드’를 유지하고 있다.
한 참모는 “오늘 직원들이 모두 일찍 출근해 조용한 가운데 업무를 보고 있다”면서 “이 대통령의 일정을 모두 취소했으며 가급적 말을 아끼고 노 전 대통령을 추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 장례’협의 임시국무회의 오후로 연기=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24일 오전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개최할 계획이었으나 유가족측과의 협의 지연으로 오후로 연기했다.
총리실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장례 문제를 놓고 유가족측과 긴밀히 협의 중이나 아직 최종 접점을 찾지 못해 임시 국무회의 개최가 다소 늦춰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도 ‘국민장(國民葬)’의 경우 전국적으로 분향소를 설치해야 하는 등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례 문제를 조속히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유가족 측과의 협의가 끝나면 바로 국무회의를 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초 한 총리는 23일 오후 조문을 위해 빈소가 마련된 김해 봉하마을로 출발하기에 앞서 각부 장관에게 “24일 오전 임시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 형식이 결정되지 않은 가운데 정부가 임시 국무회의 개최를 준비하는 데 대해 국무회의 의결이 필요한 국민장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가 가족장으로 치러질 경우 국무회의 심의를 거칠 필요가 없으나 국민장으로 엄수하기 위해서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주무부장관 제청→국무회의 심의→대통령 재가’를 거쳐야 한다.
이와 관련, 한 총리는 23일 밤 버스편으로 봉하마을 입구에 도착, 버스 안에서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유가족측을 직접 만나 애도의 뜻을 표명하고 장례 문제를 논의했다. 20여분에 걸친 대화에서 문 전 실장은 “장례 문제는 유가족들의 의견을 모아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고 김왕기 총리실 공보실장이 전했다.
◇오바마, 노대통령 서거 애도=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각)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 양국간의 강하고 활기찬 관계 증진에 기여했다고 칭송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대한민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슬픔에 빠졌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재임 기간 노 전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간의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면서 “미국 정부를 대표해 노 전 대통령의 가족과 한국 국민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전날 밤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이날 오바마 대통령의 애도 성명을 긴급 발표했으며, 장례 형식과 절차가 결론 내려지는대로 주한미대사의 등의 조문도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소식통은 “국민장 여부 등이 결정날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유족들에게 위로 서한을 발송하거나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정치인 등을 조문특사로 보낼 가능성도 있다”면서 “일단 서울에서의 상황 전개를 주시 중”이라고 전했다.
◇북,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보도=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4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하루만에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이날 ’전 남조선대통령 노무현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보도에 의하면 전 남조선 대통령 노무현이 5월 23일 오전에 사망했다고 한다”며 “내외신들은 그의 사망동기를 검찰의 압박수사에 의한 심리적 부담과 연관시켜 보도하고 있다”고만 논평없이 짤막하게 전했다.
북한이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하루만에 보도한 것은 속보 개념에 무딘 평소 보도 행태로 미뤄볼 때 신속한 것으로,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10.4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남북한 화해.협력에 기여한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남북간 화해협력의 물꼬를 튼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의 별세 때에도 신속한 보도와 함께 유가족 등에 조전을 보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2001년 3월21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별세했을 때에는 다음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명의로 유가족에 조전을 보냈고, 중앙통신은 이틀뒤인 3월 23일 김 위원장의 조전 발송 소식을 전했다. 2003년 8월 4일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이 별세했을 때에는 다음날 아태평화위와 민경련 등 관련 기관들이 유가족과 현대아산측에 조전을 보냈고, 중앙통신도 당일 이같은 소식을 전했다.
따라서 북한이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발생한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유가족 등에 조전을 보낼 지 여부, 김 위원장 명의의 서신을 보낼지 주목된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