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스마트그리드 구축은 특유의 늦은 의사결정 구조 때문에 우리보다 늦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개발이 실증→보급→사업화로 이어지는 전략설정 능력은 탁월하다.”
지식경제부를 비롯해 학계와 연구계·산업계로 이뤄진 우리 측 스마트그리드 방문단이 지난달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정부에 제출한 출장 결과보고서의 일부다.
현재 스마트그리드는 미국와 유럽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미국을 보자.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2월 경기부양패키지법에 서명했을 때, 스마트그리드에만 40억달러를 배정했다. 스티브 위더그렌 미 에너지부(DOE) 스마트그리드 상호운용성 및 표준화 조정관은 “스마트그리드는 매우 포괄적이고 각각이 이질적이다. 속도만 앞세워 전체를 동일하게 접근한다면 결국 스마트그리드를 지극히 단순화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느림’이 단순한 ‘느긋함’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이 현재 스마트그리드의 뼈대가 되는 법제화를 먼저 진행시키고 있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미 의회는 이미 지난 2007년 스마트그리드 지원 방안을 연방법안으로 통과시켰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스마트그리드 연구개발과 시범사업 등을 국가 정책사업으로 추진한다는 게 법안의 골자다. 매칭펀드 등 자금지원 내용도 포함돼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IT를 기존 전력기술에 적용해 송배전 망(파워그리드)을 지능형으로 만들자는 것.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력 인프라 노후로 인한 대규모 정전사태를 몇 차례 겪고 나서 2003년 DOE가 내놓은 2030년까지의 전력인프라 발전 계획이 ‘그리드2030(Grid2030)’을 바탕으로 해 본격적으로 제시됐다.
스마트그리드 개념을 이용해 오는 2030년까지 국가 초전도 케이블 전력망을 구축하고, 전국 어디서나 저탄소 청정에너지를 누구나 쓸 수 있게 하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 등을 만드는 게 종국적인 목적이다.
미국에서는 스마트그리드와 관련한 프로젝트가 현재 10개 이상 진행 중이다. 가장 활발한 게 ‘인텔리그리드(intelligrid)’다.
인텔리그리드는 2003년 DOE의 지원 아래 미국 전력연구소(EPRI)에 의해 시작됐다. 전체 전력망 분야 중 특정 분야로만 기술 개발이 치우치지 않도록 아키텍처와 컨슈머 포털, DER·ADA, FSM의 네 분야로 나뉘어 각종 연구개발 과제가 진행되고 있다. 상온에서 손실 없이 전기를 전달할 수 있는 고온 초전도체, 전력 관련 스마트 칩, 전력저장기술, 연료전지 등의 연구도 활발하다.
EPRI를 중심으로 현재 수많은 전 세계 전력회사와 연구소·대학 등이 참여했다. 한국전력연구원도 연구비를 출연했다.
반면에 유럽은 환경보전과 분산형 전원의 보급·확대, 국가 간 전력거래, EU 차원의 그리드 서비스 등에 초점을 두고 스마트그리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특히 유럽은 EU 집행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난 2004년 사업추진조직을 구축, ‘유럽형 스마트그리드’를 독자 구축하고 있다.
지난 2006년 고유 스마트그리드 비전을 발표한 EU는 이듬해에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5개의 연구 분야를 선정, 작년에 내놓은 첫 번째 보고서에서 연구개발의 우선순위까지 지정해 놓고 있다.
올해는 내달 열리는 국제배전협의회(CIRED)와 유러피안 콘퍼런스 등의 행사에서 보다 진일보된 보고서를 내놓아 미국보다 한발 앞선 독자 모델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미국은 스마트그리드 추진에 여전히 속도를 못 내고 있지만, 유럽은 EU집행위 차원에서 스마트그리드를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EU는 오는 2022년까지 유럽의 모든 건물에 스마트계량기를 배포, 전 건물의 80%가 스마트그리드의 혜택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지난해 발표했다.
컨설팅업체인 캡게미니에 따르면, 현재 유럽의 스마트 계량기 보급 수준은 전체 가정 대비 6%다. 하지만 2012년까지 25∼40%로 보급률이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신속한 스마트 계량기 보급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공통 아키텍처와 다양한 통신기술의 상호운용성을 보장하는 표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여러 지역의 폐쇄적 독자 기술이 유럽의 스마트그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그러나 최근 스마트 그리드 표준을 정립하고 상호운용성을 보장하기 위한 움직임이 거세다. 또 표준에서도 개방형 표준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는 게 캡게미니의 분석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IBM이나 시스코 같은 미국 전통 IT기업은 유럽 내 가정에 디스플레이 패널을 설치, 스마트 계량기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알기 쉽게 소비자에게 보여주려는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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