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IT기기·소프트웨어·인터넷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자 경험(UX:User Experience)’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다. 인터넷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이제는 산업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UX는 말 그대로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느끼고, 사용하는 방법 등을 말한다. 사실 UX라는 표현은 등장한 것이 오래되지 않았을 뿐, UX를 적용해 히트한 상품들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과거에는 기업과 제품의 경쟁력이 기술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기술의 진화 속도가 빠르고 후발주자들도 선발기업의 기술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다. 단순한 성능 경쟁은 곧 가격 경쟁, 출혈 경쟁으로 변질된다. 이제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술력에 새로운 무엇이 더해진 것, 즉 소비자에게 UX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발전 역사를 되짚어보면 휴대폰 시장 초기에는 벨소리 화음, LCD 액정의 컬러 수, 액정크기, 카메라 모듈의 화소 수 등 기술적인 부분이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한 이후에는 새로운 UX를 제공한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슬림’을 강조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모토로라 ‘레이저폰’이 그랬고, 새로운 터치 경험을 강조해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아이폰’ ‘햅틱폰’ 등이 그렇다.
그 이전에 우리에게 휴대형 카세트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워크맨’도 대표적인 UX 히트상품으로 볼 수 있다. 들고 다니면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휴대성을 갖춘 디자인과 제품명에 ‘걷다’라는 의미의 ‘워크’가 결합되면서 소비자에게 새로운 UX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UX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류현정 IT칼럼니스트는 “인간의 오감 자극, 감성적인 이야기, 의인화, 향수 자극을 성공적인 UX를 위한 네 가지 포인트”라고 꼽았다.
◇오감 만족=UX를 높이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인간의 모든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것이다. 심미안적인 디자인으로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빛, 소리, 감촉, 향기 등 다양한 요소를 동원해 촉각, 청각, 후각까지 자극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햅틱폰’은 촉각을 승부수로 던져 성공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촉각을 의미하는 햅틱은 로봇공학에서 등장한 첨단 기술 용어다. 그러나 ‘만져라, 반응하리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햅틱폰은 기계와 교감하는 새로운 경험(촉각)을 사용자에게 제공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햅틱폰의 글로벌 버전인 ‘터치위즈(TouchWiz)’도 전 세계 풀터치스크린폰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팬택 계열 스카이가 내놓은 휴대폰 ‘후’도 눈길을 끈다. 마이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감지하는 ‘바람인식’ 기능이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사진이 바람에 날려 다음으로 넘어가고 대기화면에서 바람이 불면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이 연출된다. LG전자와 MBC는 지상파DMB를 활용한 3세대 방송, 즉 촉감 방송(청각 위주의 라디오가 1세대 방송, 시청각 위주의 TV가 2세대 방송이라면 촉감 방송은 3세대 방송)을 개발 중이다. 폭탄이 터지거나 축구경기에서 골망을 흔들면 휴대폰이 진동하고, 나이트클럽 장면에선 조명이 깜박거리는 식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요즘 사회 전반에 스토리텔링, 이야기가 가지는 힘에 대한 재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이 있는 이야기는 제품에 매력을 더해준다. 삼성전자가 아르마니TV를 만들고 LG전자가 프라다폰을 만드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제품이 등장한 가장 큰 이유는 아르마니, 프라다라는 브랜드가 갖고 있는 힘, 즉 세계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 지닌 다양한 함의(예를 들어, 아르마니를 사랑하는 뉴요커의 문화와 열정, 프라다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까지의 과정 등)를 제품에 녹여내기 위함일 것이다.
‘보르도TV’는 삼성전자가 북미 TV 시장 1위를 달성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제품이다. 보르도 크리스털 잔 모양 TV의 탄생은 TV를 가전제품이 아닌 가구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최고급 와인 생산지 보르도의 이미지가 더해지고 때마침 불어온 세계적인 와인 열풍까지 가세하면서 보르도TV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제품으로 거듭났다. 장인이나 영웅 등 이야기를 지닌 제품은 그 가치가 배가된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제품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의인화로 소구하라=‘텐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LG전자 초콜릿폰의 성공에는 LED 버튼이 한몫했다. 눈웃음을 치는 듯한 초콜릿폰의 LED 버튼을 보고 있으면 새까만 애완동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반도체 회로와 각종 부품이 얽히고설킨 기술집약적 제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비자는 왠지 모를 정을 느낀다. 친구나 애완동물 같은 느낌을 주는 디지털 기기는 많은 소비자의 관심을 받는다.
디즈니와 제휴하고 출시한 아이리버(옛 레인콤)의 미키마우스 모양 MP3플레이어는 미키마우스의 귀 부분에 해당되는 공 모양 버튼을 돌려 볼륨과 음악 건너뛰기 설정이 가능하다. 현재 상태가 표시되는 십여개의 LED 조명은 미키마우스의 눈 모양처럼 보인다.
2007년 미국 조지아테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애완동물에 별명을 붙이고 아프면 걱정하듯 로봇 청소기에도 비슷한 감정행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로봇 청소기 ‘룸바’에 별명을 붙이거나 예쁜 옷을 입히는가 하면 여행 갈 때 로봇 청소기를 데려가기도 한다. 심지어 로봇 청소기가 집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집 안 구조를 바꾸거나 애벌 청소까지 해 놓는 일도 있었다. 생명력을 불어넣은 디자인, 그것은 소비자의 총체적인 경험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비법이다.
◇향수를 자극해라=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립고 소중한 것이 된다. 특히 향수는 각박한 현대인을 위로하는 좋은 장치다. 아스라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풍부한 감성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삼성전자와 덴마크의 가전업체 뱅앤드올룹슨(Bang&Olufsen)이 협력 개발한 휴대폰 ‘세린’은 원형 키패드를 채택해 예전 다이얼 전화기를 연상케 한다. 투박한 소리도 재현했다. 엡슨 디지털카메라 ‘R-D1’은 사진 찍을 때 ‘찰칵’ ‘드르륵’ 하는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리를 들려준다. 셔터를 누른 뒤 셔터 복원을 위해 레버를 젖혀야 하는 점도 수동카메라를 닮았다.
그러나 새로운 UX를 제공하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고 모든 소비자가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기능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익히기 쉬워야 한다. 뻔하고 식상한 감성 자극은 자칫 소비자가 느끼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제품 사용 의지를 시들게 할 수 있다.
사용자의 총체적 경험, UX.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도 풍성한 UX를 제공하기 위해선 기술력, 상상력, 트렌드를 보는 세 가지 눈이 필요하다.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되 기술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메울 수 있어야 한다. 식상하지 않고, 너무 앞서 나가지도 않는 제품을 만날 때 소비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
◇UX 전담조직 신설 붐
UX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UX 전담조직을 신설하는 기업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정보통신총괄 무선사업부 내에 UX 파트를 신설했다. 햅틱폰 등 혁신적인 제품들이 UX 파트가 주도해 만든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UX파트를 거쳐 새로운 UX를 제품 속에 담아낼 계획이다.
IT서비스 업체인 LG CNS도 이례적으로 사내에 디자인 전문 연구소인 ‘UX랩’을 오픈했다. UX랩은 IT서비스 산업 관련 디자인 연구센터로는 국내 최초로 설립됐다.
LG CNS가 UX랩을 만든 이유는 디자인 마인드가 없는 영업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사에 서비스를 제안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때 디자인의 고려는 필수 사안이 됐다.
LG CNS가 수행한 ‘콜센터 구축 프로젝트’는 UX 디자인 개념을 적용한 결과 업무 시스템 동선이 28%나 단축돼 피로도 감소와 함께 생산성이 대폭 향상된 것으로 조사됐다. LG CNS는 UX팀을 활용해 엔지니어링 기능과 함께 사용자의 이용패턴을 고려한 디자인도 함께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UX랩 구성원들은 디자인 전공자뿐만 아니라 경영, 영문, MIS 등의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인물로 구성돼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디자인을 개발하게 된다.
이 밖에 UX 전담조직을 두기 어려운 기업을 위해 UX 컨설팅 전문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디스트릭트홀딩스 등 UX 디자인 전문업체도 생겨나고 있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