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는 유통업체의 PL(Private Label; 자체상표) 상품 비중이 전체 매출액의 48%를 차지합니다.” PL제조회사협회(PLMA:Private Label Manufacturers Association) 브라이언 샤로프 회장은 26일(현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4회 국제 PL 박람회’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첫 마디를 뗐다. 세계적인 시장조사업체 닐슨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현재 유럽에서는 PL 비중이 가장 높은 영국을 필두로, 서유럽의 국가들에서는 30~40%,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20%대, 가장 낮은 수준인 그리스, 터키는 각각 18%, 13%의 비중을 PL 상품이 차지하고 있다.
샤로프 회장은 아시아 시장의 경우 한국의 PL 비중이 현재 8%, 중국은 5% 미만 등으로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이 시장에 진출한 유통업체들의 PL전략이 확고한 만큼, 앞으로 가파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면, 전 세계 유통업체들이 이처럼 PL확대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샤로프 회장은 PL만이 유통업체와 소비자, 제조회사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나 소비자는 좋은 물건을 싸게 사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다”며 “유럽의 유통업체들은 제조회사와 함께 비용을 줄여 저렴하게 PL을 선보이면서 이를 확실히 만족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런 이유로 매년 PL박람회 참가 업체들이 10%씩 증가하는 등 PL시장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를 증명하듯 이날 PL박람회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유통업체 바이어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PL박람회는 PL제조회사들의 모임인 PLMA가 유통업체들을 대상으로 PL제품의 전시와 판매, 상담을 위해 여는 행사로 매년 유럽의 암스테르담과 미국의 시카고에서 2차례 열린다.
이번 박람회는 세계 70여개 국가로부터 2천여 제조업체들이 참가해 자사 제품을 전시했으며, 90개국으로부터 5천여 명의 무역업 관계자들과 유통업체 바이어들이 찾아와 이들 제품을 둘러봤다. 전체 전시관은 크게 ‘식품관’과 ‘비식품관’으로 나뉘고, 각 전시관이 다시 국가별로 나뉘어 제조업체들의 전시 부스가 차려진다. 또 신제품을 선보이는 ‘뉴 프로덕트 엑스포’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상품을 전시하는 ‘아이디어 슈퍼마켓’ 전시관이 따로 마련돼 있다.
올해 박람회의 두드러진 경향에 대해 PLMA 샤로프 회장은 “세계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대용식, 간편식(ready to eat) 제품들이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올해에는 특히 아이디어 슈퍼마켓 전시관에 신세계 이마트가 PL상품인 ‘스마트 이팅’ 상품을 전시해 시선을 끌었다. 이 전시관은 유통업체들이 아이디어를 더해 개발한 PL 신제품을 선보이거나 제조업체가 개발한 아이디어 상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이 전시관에는 신세계 이마트 외에도 국내 제약업체인 신신제약이 진통을 덜어주는 밴드 제품인 ‘진통완화패치’를 선보이기도 했다. PL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아이디어 슈퍼마켓의 올해 트렌드에 대해 이날 현장을 둘러본 신세계 이마트 상품개발본부 PL정책팀 성열기 팀장은 “웰빙, 친환경과 관련된 상품이 작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 전시관에는 ‘환경친화상품’ 코너가 따로 마련돼, 친환경 면으로 만든 기저귀와 친환경 소재로 만든 장난감, 화학성분 없이 모기를 쫓아주는 팔찌 등 다양한 친환경 제품이 전시돼 있었다. 또 웰빙 트렌드에 맞춘 ‘오가닉 건강 관련 제품’ 코너도 전시관의 큰 면적을 차지했다.
한편 박람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식품관’의 경우 스페인, 독일, 영국 등에서 온 제조업체들이 나라별로 수백개씩 부스를 차려놓고, 시식행사와 적극적인 상담을 통해 바이어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올리브 절임 상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업체와 파스타 면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업체, 각종 차(茶)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업체 등이 갖가지 상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PLMA 샤로프 회장은 PL 비중이 최대로 커질 수 있는 수준이 어느 정도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것은 나라별로 유통업체와 제조업체가 처한 시장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어렵다”며 “양쪽의 균형이 맞는 선까지는 계속 확대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 같은 PL 확대에 대해 일각에서는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 대부분 PL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에는 동의하지만, 유통업체와 제조업체 사이의 종속관계가 더욱 심화할 것이라는 데 우려를 나타낸다. 제조업체가 유통업체의 단순 하청업체로 전락해 자신의 브랜드를 잃게 될 경우, 장기적으로는 독립적으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유통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제조업체는 더욱 약자가 돼, 유통업체가 부당한 횡포를 부릴 경우에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이번 박람회의 ’한국관’에서 만난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이 같은 우려를 기자들에게 드러냈다.
한 업체의 영업본부장 A씨는 “우리 입장에서는 PL이 없을 때가 더 좋았다”며 “단기적으로는 PL이 매출을 키워주니 도움이 되긴 하지만 길게 보면 자신의 브랜드를 잃게 되고 회사 존속이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적절한 밸런스(균형)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업체의 B 사장은 “국내에서는 대형마트 바이어를 한 번 만나기 위해 중간 벤더(공급업자)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영업 활동이 필요한데, 우리같은 작은 업체가 그럴 만한 여력이 없어 PL을 못하고 있다”며 “박람회를 통해 해외 바이어를 직접 만나면 납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박람회 비식품관에 차려진 한국관은 올해 처음으로 꾸려진 것으로, 무역협회의 비용 지원으로 10여 개 중소기업이 참여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