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세상읽기] SF와 불사](https://img.etnews.com/photonews/0905/090527053625_613046474_b.jpg)
과학소설의 특·장점 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동시에 가장 모호한 것으로는 ‘경이감’이 있다. 이는 ‘sense of wonder’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짧게 풀어서 옮기기에는 너무나 큰 개념이지만 억지로 간략하게 줄여보자면 ‘낯설고 놀라우며 감탄스러운 느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허구는 낯섦과 익숙함의 양쪽에 걸치게 마련이지만 과학소설은 전자를 강력한 도구로 삼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한다.
자연스러웠던 것들을 되돌아보고 다른 각도에서 유별나게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경이감의 시초다. 그렇다면 가장 근원적이고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상식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인류의 문화가 터를 닦았던 일종의 주춧돌과도 같을 것이다. 모든 종교가 예외 없이 긴 시간과 커다란 지면을 할애해 다뤘으며 의학이 끝내 풀고 싶어하면서도 당분간은 외면하는 숙제는 곧 필멸의 운명, 즉 죽음이다.
SF는 태생적인 한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죽음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탄탄해 보이는 장애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SF에 죽음이란 맛깔스러운 도전의 대상이 된다.
가장 기본적인 불사의 전 단계는 다름 아닌 ‘장수’다. 죽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는 비단 SF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에서 판타지를 거쳐 할리우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지치지도 않고 이어진다. 하지만 SF라면 어느 정도 그럴 듯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로버트 하인라인 작 ‘므두셀라의 아이들’에서는 두 가지 안을 제시한다. 즉 장수 형질을 가진 혈통들 간의 인위적인 교배, 그리고 노화를 일으키는 노폐물을 인공적으로 제공하고 새로운 혈류를 주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과학이 폭넓게 나아가면서 불사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육체를 떠나도 그 안에 담겨 있던 지성의 정수, 더 나아가 인간의 정수는 다른 매체 속에서 살 수 있다는 SF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이버펑크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뉴로맨서’에서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던 도중 사망한 인물의 의식이 여전히 그 안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버트 소여의 ‘마인드스캔’은 이러한 형태의 불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유전 질병 때문에 요절을 피할 수 없자 스스로의 의식에 관한 양자상태, 즉 의식 자체를 스캐닝해서 안드로이드 몸체에 집어넣는다. 하지만 불치병의 치료법이 개발되면서 이제 두 개의 나, 동일한 두 개의 의식이 같은 시대에 함께 존재하게 된다. 권리 양도 문서에는 이미 서명한 상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짜 주인공일까. 자연발생적인 육체가 곧 존재를 보장하는 것일까. 과연 인간이란 육체와 무관한 존재일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문제다. 하지만 골치 아프다고 해서 계약서와 법리적인 판단에 따르면 과연 마음이 개운할까. 아니 그 이전에 과연 정보의 총합이 존재와 동일할까. 상태를 스캐닝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렇게 주렁주렁한 포도송이처럼 생경한 문제와 의문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SF가 가진 경이감과 매력의 시작이다. 우리는 ‘죽어서도 많은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한다. 구태의연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말이지만, SF에서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시적인 표현이 아니다. 어쩌면 그리 머지않아 현실에서도 그럴지 모른다.
김창규 SF소설가 sophidia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