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R&D) 투자의 가치와 효율성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서영주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초대 원장의 꿈은 크다. 우리나라가 폐허 속 움막에서 살다가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서기까지 그 밑바탕이 됐던 산업기술 R&D 기획·평가·확산의 전(全) 주기 모델과 경험을 보유한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되는 일이다.
미국·독일·일본 등 선진국은 그들 선진 모델 자체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개도국은 이제야 쫓아오려고 발버둥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진국을 쫓아가며 어깨너머로 배우던 시절부터 우리 고유의 선진화된 모델까지 국가 성장 전 단계 모델을 확보하고 있다.
서 원장은 “국가 R&D의 효율을 높여 그 결과물의 가치를 제고하는 것이 KEIT에 주어진 가장 큰 임무”라며 “전 세계 유일의 성장 전 단계 모델을 배우려고 여러 국가가 찾는 모범을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추가경정예산까지 합쳐 연간 2조원가량을 집행하는 기관인만큼 고도의 투명성이 요구된다. 정부 예산이 들어갈 R&D 과제 선정·평가가 사실상 KEIT 전권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서 원장은 단순히 문구 속에 있는 죽은 윤리헌장보다는 ‘KEIT 하면 떠오르는 정신’을 만들 작정이다. 국민과 산업계가 그리고 직원 모두가 공유하는 ‘R&D 정신’을 가다듬겠다는 뜻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 기관 출범이 이뤄졌습니다. 의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먼저 세계적 불황으로 국가 R&D에 국민적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시기에 중책을 맡게 돼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번 글로벌 경제 위기로 2∼3년 후면 전 세계 산업과 경제의 판도가 재편될 것입니다. 어렵고 불확실한 시기일수록 기술 개발로 산업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나가 ‘생존자 효과(survivor’s effect)’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R&D 현장의 지식과 노하우를 통합하고 부단한 혁신만이 기술 개발의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고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정부는 지난 1월 산업기술혁신촉진법을 공포하고 R&D 관리기관의 통합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산업기술평가원을 중심으로 부품소재산업진흥원·정보통신연구진흥원·디자인진흥원·청정생산지원센터의 R&D 평가 관련 업무가 통합돼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으로 재설계됐습니다.
-취임 후 조직 개편이나 업무 혁신안들로 눈코 뜰 새가 없다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KEIT는 산업기술의 기획·평가·성과 확산 등 R&D 전 주기를 체계적으로 상시 관리해야 하는만큼 업무 혁신이 불가피합니다. 조직개편과 업무 혁신을 추진하는 데 가장 큰 잣대는 ‘전문성 강화’였습니다. 이 전략에 따라 KEIT는 ‘2본부 2실 5단 1센터 20팀’으로 조직을 구성, 경영기획본부와 사업평가본부 쌍두마차 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현재 본부별 특징이 잘 살아나도록 인력을 재배치하는 한편 경영 효율화 측면에서 퇴출제를 도입해 내부 경쟁을 유도하는 등 직원들이 스스로 전문성을 강화할 수밖에 없도록 업무 프로세스를 혁신하고 있습니다. 평가 전문가 풀만 3만여명에 이릅니다. 이 역시 정예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평가위원 적격성 평가시스템 등 관리체계를 개선하고 있습니다. 평가시스템의 표준을 정립하는 일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표준평가지표를 정립하는 한편 선진 R&D 지표를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평가관리 업무가 시스템적으로 잘 정착이 돼서 고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국제기준에 맞는 프로세스가 확립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산업 원천기술 개발사업 평가에 적용되는 ‘ISO9001 인증’을 전 분야로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 중입니다.
-올해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할 일은 어떤 것들인가요.
▲우선 R&D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2005년 기준 정부 R&D 예산의 절대 규모가 미국의 15분의 1, 일본의 3분의 1 수준인 우리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효율성 증대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KEIT는 단순하게 R&D 재원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이끌어내고 이 지식으로 다시 수익을 창출하는 선순환이 일어나도록 시스템을 구축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R&D 재원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인력 재배치를 하면서 사업관리부서의 인력 투입을 확대했습니다. 정부와 KEIT는 연구비 유용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후 점검뿐 아니라 연구비 유용을 예방할 수 있는 ‘지식경제 R&D 연구비 관리시스템 개선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우선 기존의 연구비 선지금, 후정산 방식으로 이뤄지던 연구비 지급·관리를 연구비 포인트 지급을 통한 실시간 모니터링 체계로 바꿔 연구비 관리의 투명성을 한층 더 높일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고객 섬김’입니다. 산업기술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국민이 신뢰하고 존중하는 기관이 되기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없습니다. 오랜 행정 노하우로 다져진 테크닉이 아니라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불편과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자세가 전제돼야 한다고 봅니다.
-중장기적으로 KEIT의 도약과 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청사진을 갖고 계신가요.
▲IT·생명공학(BT)·나노기술(NT) 등을 아우르는 ‘기술 융합’의 시대를 맞아 이에 대한 각국의 R&D 경쟁이 치열합니다. 이미 세계 각국의 학자들은 인간과 기계·우주·생명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과학적 방법과 인문학적 방법으로 동시에 고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산업기술 역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벽을 허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KEIT도 과제 기획 기능이 강화된만큼 ‘지식경영’과 ‘융·복합’ 추세에 맞춰 청사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KEIT 발전방안 TF팀’이 구성돼 가동 중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부 용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핵심 인력이 주축이 돼 조직의 발전 방향을 논의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통합 이전의 기관 구성원들을 골고루 포진시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개선하는 등 합리적으로 의견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칠 산업기술 평가·관리 체계의 큰 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선진 지식 기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원천기술을 한발 앞서 확보하고 사업화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R&D 지원 주체의 사기가 높지 못하면 R&D 투자의 효율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KEIT 직원들의 역량 개발에 적극 나설 계획입니다. 이는 새로운 조직문화 정착 프로그램과 맞물려 통합에 따른 이질감과 진통을 조기에 제거하고 KEIT가 신뢰받는 R&D 전문기관으로 자리 매김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또 KEIT가 산업기술 R&D 과제의 전 주기를 관리함에 따라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선진화된 평가가 진행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두겠습니다. 특히 미국 항공우주국(NASA)·국방부 등이 기술평가에 활용하고 있는 ‘TRL(Technology Readiness Level)’ 평가를 도입해 사업화 가능성에 정량적 평가를 실시할 방침입니다. TRL은 재료·부품·소자·시스템 등 특정 기술에 대해 기초연구 단계부터 사업화 단계까지 총 9단계로 나눠 해당 기술의 산업별 성숙도에 따라 과제 지원 형태를 다양화하는 것입니다. 현재 부품소재산업에 시범 적용하고 있는데 이 기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보완한 후 확대 적용할 예정입니다.
-10년 뒤 KEIT가 어떻게 변해 있을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통합의 노력이 결실을 얻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산업기술 R&D 평가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평가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앞다퉈 찾아올 겁니다. 정부의 ‘577 전략(R&D 투자 GDP 대비 5% 수준 확대, 7대 R&D 분야 집중 육성, 시스템 선진화·효율화로 2012년 과학기술 7대 강국 달성)’과 ‘신성장동력 종합 추진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현되면 개도국에서부터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국가 경제 성장단계 전반에 걸쳐 R&D 평가·관리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서영주 원장은
서영주 초대 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은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행정고시 20회에 합격,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통령비서실 경제구조조정기획단 국장과 중소기업청 벤처기업국장, 정책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산업계와 기업 사정에 두루 밝다. 이후 산업자원부 무역유통국장과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정책조정실장 등을 거쳤다. 2007년부터 2년간 전자부품연구원장으로 활약했으며 지난달 초대 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으로 선임됐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