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세상읽기] 소통의 벽을 넘는 존재들

[SF 세상읽기] 소통의 벽을 넘는 존재들

 인간을 정의하고자 시도하는 이는 무수하게 많다. 고금의 철학자와 사회학자와 종교인, 진화를 연구하는 과학자 등. 근자에는 양자역학과 인간의 의식을 함께 설명하려는 시도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딱히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해답은 아직 요원한 것 같다. 인간의 관념적 위치나 능력을 설명하는 길 중에 초월성과 대조하는 방법이 있다. 초월성은 흔히 전능함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편의상 이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인간은 ‘현재 초월성과 전능함을 지니지 못한 존재’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이란 곧 한계와 능력부족에 따라 정의된다는 말이다. 순환논리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겸손을 떨어본다면 우리에게는 해결 불가능한 근본적 한계가 한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소통과 공감의 불완전함, 또는 타인과 나의 분리의식이다.

 SF는 이 문제에도 다양한 방향에서 메스를 들이댄다. 그런 주제들을 다루는 데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텔레파시다. 텔레파시란 사실 엄밀한 의미의 과학 개념은 아니지만 SF에서는 즐겨 사용하고 있다.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에서는 인간 남성인 겐리와 외계인 에스트라벤의 오해가 핵심 갈등으로 부각된다.

 에스트라벤과 겐리는 문화와 출신 행성뿐 아니라 신체 구조에도 큰 차이가 있다. 즉 에스트라벤은 발정기에만 성별이 결정되는 중성인이다. 두 사람은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마음에서 진솔하게 우러나오는 말, 즉 텔레파시로 소통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 텔레파시는 개인 간 거짓 없는 의사소통을 비유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분리의식을 뛰어넘는 존재들이 있으니, 이른바 ‘전체의식’을 공유하는 외계생물들(또는 외계인)이 그것이다.

 이들에게는 ‘나’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분리된 육체가 있을지언정 의식은 하나인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우리’며 ‘우리’는 ‘나’다. 따로 떨어진 개체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상당한 지적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전체의식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의 약점이기도 한 외로움과 상실감이 없기 때문에 더 질 높은 행복감을 느낄까. 아니면 나와 타인의 구분 속에서 자존감을 느끼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존재일까.

 SF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이 그와 같은 전체의식의 상태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레그 베어의 ‘블러드 뮤직’은 인류의 다음 단계를 그린 소설이다. 지능을 가진 세포 크기의 생체기계들(또는 유기체 나노머신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이 한 인간의 몸에 들어간다. 이 세포들은 전체 의식을 공유한다. 그리고 인간의 몸이라는 ‘소우주’를 완전히 학습한 다음 바깥쪽, 즉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환경으로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 한다. 세포들은 몸을 제공한 최초 인간의 피부와 뇌를 완전히 차지한 다음 전체의 일부로 소화하고 하수구를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그 속에 녹아들고 ‘개인’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의식의 합일은 어느 종교가 궁극의 상태로 지향하는 바와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합일의 끝에 자족이 그득하고 모든 갈등과 고민이 사라진 깨달음의 신세계가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적어도 SF를 만들고 감상하며 즐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쉬이 수긍하지 않을 것 같다. 한계를 미리 상상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SF가 주는 경이감은 울타리를 넘는 데에서 오기 때문이다.

김창규 SF작가 sophidia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