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 IT 이슈

 “글로벌 우수의약품제조관리기준(GMP)을 충족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1순위입니다.”

 국내 대표 제약회사의 최고정보책임자(CIO)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올해 최우선 IT과제다. 즉 의약품 제조 전반에 걸쳐 GMP에 적합한 환경을 갖춰 국제 수준의 품질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많은 제약사들이 국제 수준의 의약품 생산시설을 갖추기 위해 기존 공장을 리모델링하거나 새로 규정된 GMP 기준에 맞춰 신축 공장에 제약 통합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IT혁신을 계획하고 있다. 통합생산관리시스템(MES), 품질관리시스템(LIMS)을 비롯해 전사적자원관리(ERP), 전자문서관리시스템(EDMS), 프로젝트관리시스템(PMS) 등 제조 분야 전반에 걸쳐 관련 시스템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이들 프로젝트는 개별적으로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십억원이 넘는 규모다. 그동안 IT 투자에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제약업계로서는 그간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제조 설비의 정보화에 적극 투자할 만큼 현재 국내 제약사들의 경영 환경이 좋은 편은 아니다. 글로벌 경제 위기와 함께 불법 리베이트(의약품 구입 대가로 제약업체가 병원이나 의사 측에 제공하는 금전적 이익)에 대한 과징금 부과, 정부의 약가인하 정책 등이 맞물려 삼중고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제약 산업 선진화 정책인 ‘밸리데이션(Validation·검증)’ 의무화 등 각종 제도와 규제가 강화되면서 이에 부합하는 생산설비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은 과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제약 산업이 FTA, 규제 강화 등의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면서 제조 생산성을 제고 등 내적 혁신까지 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며 “국내 제약사들이 경쟁력 있는 가격과 품질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전략적으로 정보시스템 투자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핵심 전략 키워드 ‘밸리데이션’=제약 산업은 다른 제조 산업에 비해 규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의약품의 경우 인간의 생명, 건강과 직결되기 때문에 의약품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법적 규제와 제도들이 있다. 국내에서는 대표적인 제약 법규가 바로 GMP다. GMP가 제약회사들의 IT 전략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GMP 기준이 대폭 강화되면서 내년부터 ‘밸리데이션(Validation)’ 의무화가 시행된다. 밸리데이션이란 제조설비, 제조순서, 품질관리 등 미리 설정된 기준에 따라 일관되게 의약품이 제조·판매되고 있다는 것을 검증하고 문서화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제약사에서 1만개의 약을 생산한다고 했을 때 1만개 모두 똑같은 제조 환경에서 만들어 일관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밸리데이션은 GMP 세부 기준 중 하나인데, 기존 GMP보다 강화된 품질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식약청은 지난해 1월 신약 제조공정을 시작으로 7월에는 일반의약품, 내년 1월부터는 나머지 의약품에도 GMP 밸리데이션 체계를 구축하도록 의무화했다. 밸리데이션에는 공정, 시험방법, 세척, 제조지원설비, 컴퓨터시스템 항목 등이 있는데 현재 제약업계 CIO들의 가장 많이 고민하는 영역은 컴퓨터시스템 밸리데이션(CSV) 분야다. CSV는 제조공정에서 얻은 단계별 결과를 일일이 수기로 작성해 종이문서로 남기던 것을 전자문서로 남기는 것을 말한다.

 김성수 비알네트컴 상무는 “수작업으로 해도 되지만 업무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CSV는 필수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며 “CSV의 경우 향후 FTA에 따른 시장 개방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약 업체 중에서 CSV 도입을 준비하고 있는 곳은 아직 많지 않다. 시행 시기는 눈 앞에 다가왔지만 실질적으로 CSV를 준비해 운영하고 있는 곳도 드물다.

 현재 CSV 도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곳은 한미약품이다. 한미약품은 올해까지 경기도 평택공장에 CSV를 도입하고 내년에는 전 제약공장으로 이를 확대할 계획이다. 한미약품은 2006년 말부터 글로벌 전사적자원관리(ERP) 통합 및 통합생산관리시스템(MES) 구축 등을 통해 CSV 도입 기반을 다져왔다.

 ◇MES 동반 성장 기대=현재 대부분의 제약 업체는 생산현장의 GMP 시스템화로 수작업에서 생기는 실수를 없애기 위한 고민이 한창이다. 밸리데이션으로 제조 공정의 검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 종이문서 제작과 수작업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IT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이에 최근 부각되고 있는 것이 바로 MES이다. MES는 제조 전반에 걸쳐 공장 활동을 실시간으로 제어하고 감시, 추적, 분석한다. 또 이에 대한 결과와 상태를 보고해 빠른 의사 결정을 지원한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등의 분야에 MES가 적극적으로 도입됐지만 최근 들어 제약 업계에도 MES 적용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2005년 유한양행이 국내 처음으로 MES를 도입한 데 이어 유유제약, 한미약품, 휴온스 등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현재 삼일제약, 중외제약, CJ제일제당 등이 한창 MES를 구축하고 있다.

 동아제약의 경우 현재 설계단계에 있는 충남 합덕 공장에 MES를 비롯해 전자문서관리시스템(EDMS) 등을 구축할 예정이다.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MES 도입이 필수적인 만큼 적극적으로 도입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이재현 DA인포메이션 대표는 “천안에 있는 주 공장에 cGMP 적용이 힘들 것으로 판단, 충남 합덕의 새로운 공장에 이를 적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며 “하지만 공장 설립이 늦어지는 만큼 그 기간 동안 기존 공장에 MES 도입을 추진해 이전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MES를 도입한다고 해서 제조 과정의 혁신이 단번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제약사들은 MES만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화 설비를 도입할 때나 설비 제어 시스템 도입에 맞춰 MES를 같이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또 현재 국내 관련 전문가가 많지 않다는 점이 시장 확산에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신축 공장, cGMP 기준 적용=최근 제조 기업들의 동향을 살펴보면 신축 공장을 짓는 곳이 눈에 띄게 많다. 이런 불경기에 새로운 공장을 짓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컴플라이언스 이슈와 직결된다.

 이재현 대표는 “기존 공장에서 약을 생산하면 우리나라에 판매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미국이나 유럽에 수출할 수는 없다”며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FTA와 cGMP 기준에 맞춘 제조 공정을 갖추기 위해 많은 제약사들이 새로운 공장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cGMP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마련한 우수의약품 제조와 품질관리 기준으로, 국내 제약회사가 미국시장에 의약품을 수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한미약품과 대웅제약 등은 이미 cGMP 기준에 부합하는 공장을 건설했으며 CJ제일제당 제약사업본부, 보령제약, 일동제약, 일양약품, LG생명과학, 보령제약 등 20여 제약기업이 현재 글로벌 GMP 기준에 맞춰 공장을 신축하고 있거나 신축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특히 CJ제일제당의 경우 충북 청원군 오송생명과학단지 내 국제수준의 cGMP 제약공장을 신설하면서 ERP와 MES를 동시 구축하고 있다. 지난 6월 15일부터 본격적인 구축에 들어갔으며 내년 3월까지 총 10여개월에 걸쳐 진행한다.

 이상몽 CJ제일제당 상무는 “오송공장 시설을 cGMP 기준에 엄격히 맞춤으로써 글로벌 제약 회사로 발돋움하는 발판으로 삼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ERP 확대 적용= ERP 적용도 제약 업계의 끊이지 않는 이슈다. 물론 수년 전부터 ERP 도입은 계속적으로 이어져 왔지만 최근 중견 제조사들까지 확대 적용하고 글로벌 통합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 대형 제조업체들은 SAP ERP 솔루션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견 제약 회사의 경우 오라클 ERP 솔루션이나 SAP ERP 솔루션을 두루 사용하고 있다. 그 외 영세한 제약 기업들의 경우 국산 ERP 혹은 MIS를 쓰고 있는 상황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제약회사는 해외 수출이 많은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감사가 나왔을 때 외산 ERP 제품을 사용한다고 하면 인정을 해주는 경향이 있다”면서 “때문에 SAP 솔루션 등 외산 제품이 많이 선호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 회사 중 제일 먼저 ERP를 도입한 곳은 대웅제약이다. 10년 전 SAP ERP를 전사적으로 도입했다. 이후 여러 제약사들이 일정 영역에 한해 단계적 도입을 추진했고, 한미약품, 녹십자 등이 SAP 솔루션을 최근 구축했다. 얼마 전 중외제약이 SAP 패키지 도입에 들어간 상황이며 보령제약도 내년에 SAP ERP 도입을 계획하고 있다. 또 한미약품 등 선도적으로 도입했던 제약사들의 경우 최근 글로벌 ERP 통합과 함께 업그레이드 작업에 나서고 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