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컴퓨터 다루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A씨(41)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장래희망으로 ‘소프트웨어(SW) 개발자’라는 여덟글자가 적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01년 직접 SW벤처를 창업한 그는 이른바 ‘잘나가는 동기 동창생’으로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엉뚱하게도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기회’가 ‘위기’로 찾아왔다. 국내 대형 은행에 자사 개발 SW 공급권을 따내 회사의 모든 인력을 집중했으나 중간에서 대형 IT 서비스 업체가 대부분의 이익을 가로챘기 때문. 계약이 끝났을 때 회사는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유능한 개발자들은 제 살길을 찾아 떠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는 지금 학창시절의 꿈과 무관하게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국내에 글로벌 SW 기업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시장을 두드렸던 SW 개발자들이 SW 전문기업을 떠나고 있다.
◇떠나는 개발자들=중견 정보보호 SW 업체 B CEO는 “대기업에 가능하면 유능한 직원들은 파견 안 보내려 한다”며 “석 달 정도 대기업에서 프로젝트를 하던 직원이 갑자기 취업이 됐다며 나가버리는 사례가 종종 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SK텔레콤에서 파견근무를 하다, SK의 보안관리자로 자리를 옮긴 정유연씨(36·가명)는 “SW 개발자 출신이지만, 정작 개발보다는 대기업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현실에 신물이 났다”며 “박봉에 힘들어하기보다는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해외로 떠나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SW 개발자를 제대로 대접하는 풍토에서 일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프리랜서로 나서는 이들도 급증했다. 관련 업계는 전체 12만5000여명의 개발자 중 50%가량이 프리랜서라고 추정했다.
◇인건비 장사로 전락한 SW…제값 못 받아=원인은 SW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주지 않는 사회적 풍토다. 이에 SW 개발은 ‘인건비 장사’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한국의 SW 개발자에게 지급하는 맨먼스(월간 사업대가)가 말레이시아·싱가포르와 같은 동남아시아보다 열악한 상황이다.
현재 IT 서비스 기업들이 요구하는 맨먼스는 초·중·고급 개발자별로 300만·400만·500만원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다. 반면에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개발자나 컨설팅 인력을 한국에서 파견하면 체류비를 제외하고도 월 2000만원 이상의 단가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임금이 싸기로 유명한 중국도 1000만원가량을 준다는 것이다. 한 SW 개발자는 “차라리 중국 전문 용역업체로 나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SW는 공짜라는 인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 우수 인력들의 엑소더스(exodus, 대탈출)는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도급 또 하도급=문제는 이 같은 낮은 비용도 다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 SW 업체 C CEO는 “정부가 정한 노임대가를 발주자들이 발주 때부터 20∼30% 깎고 계산하는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다”며 “여기에 경쟁이 붙으면 또 20∼30%가 깎이다 보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제값을 못 받으니, 업체들은 하도급으로 수익성을 개선하려 한다.
실제로 모 정부기관이 발주한 3억원 규모의 프로젝트. 2년 이상 경력자 6명이 6개월을 상주하면서 완성해야 하며 1인당 단가는 맨먼스 기준으로 600만원으로 책정됐다. 그러나 다른 사업은 다 제쳐두고 여기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A업체는 맨먼스 500만원에 4명의 인력을 수혈받을 수 있는 B기업과 하도급 계약을 맺었고, B기업은 다시 맨먼스 300만원으로 프리랜서 2명만을 보유하고 있는 C기업에서 인력을 보충받았다.
업계에 따르면 대기업의 프로젝트 아웃소싱 비율은 최소 50% 이상이며 이 중 프리랜서 참여비율이 최소 25%는 된다는 것. 문제는 이 같은 하도급 관행이 불합리한 계약 관행을 양산해 결국 국내 중소 SW 기업들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영종 열린사이버대학교 오픈소스커뮤니티 연구소장은 “하도급 문제는 공생 관계에 입각해 서로를 하나의 파트너로 인식해야 해결할 수 있다”며 “특히 대형 IT 서비스 업체가 나서 직접 하도급 업체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바람일 뿐이다. 2005년 말 공정위의 9개 대형 IT 서비스 기업의 실태 조사 결과 사전 계약서 미교부가 7106건, 대금 미지급이 481건, 부당 감액이 1억7000만원에 달했다. IT 서비스 업체의 이 같은 태도는 하도급 구조를 고착화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특히 최근 들어 제조업에 기반한 임베디드 SW 개발 붐이 일면서 하도급 문제는 IT 서비스 업계와 SW 전문 개발업체의 구조에서 제조업까지 이어지는 구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국내 모 제조업체에서 임베디드 SW 개발을 위해 파견된 한 개발자는 “임베디드 SW 개발은 기존 SW보다 훨씬 많은 인적·물적 자산이 투입돼야 해 안정적인 대금 지급이 필수”라며 “그러나 임베디드 SW 개발에도 하도급 구조가 적용되는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탕주의 개선…교육 문제 개선 시급=IT 서비스 업체도 할 말은 있다. 바로 SW 업체들의 ‘한탕주의’다. 악화된 수익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애초 역량 이상의 프로젝트를 맡고 난 뒤 손을 놓거나 프리랜서를 고용한다는 것이다.
국내 D SW 업계 CEO는 “SW 제품을 개발해도 그 이후의 유지 보수 및 제품 업그레이드에 꾸준히 나서야 발주업체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며 “그러나 제품 판매에만 신경 써 재투자가 미흡할 뿐만 아니라 사후서비스가 열악한 업체도 일부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개발자들이 보다 자신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재교육 기관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한국SW전문기업협회와 전자신문사가 공동으로 80개 SW 기업의 개발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근무경력이 늘어남에 따라 지속적인 고급 기술자로 성장하지 못하고 나이가 들면 SW 개발자로 활동할 수 없는 이유로 38.7%가 연봉문제를, 재교육 부재가 12.9%에 달했다.
대학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SW 개발자도 부족하다. 특히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업계의 현실과 맞지 않아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무형 인재’가 없다는 아쉬움도 여전하다.
정진욱기자 coolj@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