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은 지난 수십년간 노동을 대체하는 자동화 도구였다. 사람들은 제조라인에서 24시간 일하는 기계일꾼이 머지않아 일상의 노동까지 대신하는 이른바 서비스 로봇으로 진화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 로봇자동화 수요는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100% 자동화된 미래의 멋진 삶에 대한 기대는 이쯤에서 접고 로봇 R&D정책의 방향전환을 심각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난 1990년대까지 로봇이란 공장에서 일하는 자동화기계 또는 극한환경에 투입하는 원격작업도구를 의미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로봇은 공장자동화(factory automation)를 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돕는 생활 자동화(life automation) 시장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가 청소로봇, 실버로봇, 보안로봇과 같이 일상에서 사람들을 직접 돕는 서비스로봇이다. 우리 정부가 지난 2003년 이후 지능형 로봇산업에 수천억원을 투자한 배경에도 일상의 자동화가 거대한 시장수요를 창출할 것이란 기본전제가 깔려 있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끊임없이 편한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로봇기술은 공장을 벗어나 일상 속에서 귀찮은 노동을 대체하며 자동화의 꽃을 피울 것이다. 이러한 로봇산업의 미래 발전전망은 확고한 신념으로서 로봇업계와 국민을 매혹시켰다.
2009년 현시점에서 돌아볼 때 첨단 로봇기술은 국민을 일상의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데 아직 별다른 성과를 못 거두고 있다. 청소로봇을 제외하면 인간을 돕기 위한 컨셉트로 개발된 서비스로봇은 대부분 상용화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이 로봇산업의 선진모델로 벤치마킹했던 일본의 서비스로봇 육성책도 어려움을 겪고 있긴 마찬가지다. 일본이 자랑하는 이족보행로봇이나 귀여운 디자인의 서비스로봇들도 전시장을 벗어나 상용화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들리지 않는다. 두 나라가 2000년대에 추구한 로봇산업 육성책은 첨단 로봇기술의 활용방법을 놓고 뭔가 오해하거나 최소한 커다란 조각을 놓쳐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미래의 비전을 다시 세울 수 있다. 혹자는 로봇제품의 높은 가격을 탓하고 미성숙한 로봇기술 또는 비효율적 R&D체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서비스로봇의 시장수요가 좀처럼 열리지 않는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 평범한 개인소비자 측에서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자동화의 한계효용이 점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4시간 돌아가는 생산라인처럼 노동강도가 센 곳에서 로봇자동화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가끔 커피잔을 나르는 차 심부름이나 시키려고 수천만원짜리 로봇플랫폼을 선뜻 구매할 사람은 많지가 않다. 설령 커피잔에 프림, 설탕까지 타는 서비스로봇이 등장해도 상황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첨단 바리스타 로봇보다는 그냥 커피자판기를 임대하는 편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로봇기술에 관한 착각과 오해들
개인이든 집단이든 오랜 경험으로 굳어진 사고방식을 바꾸기란 쉽지가 않다. 로봇산업은 지난 1960년대 이후 산업현장의 생산자동화를 기본 축으로 성장해왔다. 당연히 21세기의 로봇세상도 자동화 도구의 연장선상에서 꽃필 것이라 예상해왔다. 로봇공학계와 소비자, 정부 모두 로봇기술의 미래를 놓고 귀찮고 힘든 일은 모두 로봇에게 시키고 여유를 즐기는 귀족적인 삶을 떠올렸다. 어릴 적 만화, 영화에서 봤듯이 가사노동을 돕는 로봇제품을 내놓으면 그 편리함에 소비자가 환호하고 거대한 시장수요가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로봇기술이 제공할 일상의 자동화가 21세기 소비자에게 얼마만큼 가치를 지니는지 냉정하게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일상생활에서 자동화 수요가 좀처럼 늘지 못한 사실을 거꾸로 보면 첨단 로봇기술이 인간에게 직접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의 한계효용이 예상보다 턱없이 낮다는 뜻이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면 청소로봇, 식기세척기가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좀 귀찮긴 해도 방바닥을 걸레로 닦고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면 된다. 그럼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TV, 컴퓨터, 휴대폰 없이 살아도 괜찮겠냐고 물어보자. 대부분 사람은 말도 안 된다면서 펄쩍 뛸 것이다. 현대인의 삶에서 TV나 휴대폰은 공기처럼 꼭 필요한 문명의 이기다. 서비스로봇 즉 다기능 모터장치로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로봇세상의 미래는 여기에서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로봇산업의 근간인 자동화 기술의 부가가치는 생산현장이 아닌 평범한 삶 속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하향세를 타고 있다. 현대인은 승강기에서 전동칫솔까지 모든 형태의 자동화를 사회전반의 당연한 추세로 받아들인다. 요즘 소비자는 당연한 자동화 서비스를 특별한 것으로 평가하고 높은 비용을 지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서비스로봇의 목표로 단순노동의 대체에 초점을 맞춘 것은 1980∼1990년대 이후 내리막길로 접어든 백색가전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결과를 낳았다.
일상의 자동화 수요는 꾸준히 늘지만 한계효용도 점점 줄어든다. 따라서 로봇자동화에 기반해 개인소비자가 원하는 만능대박상품을 창출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평범한 소비자의 시각으로 보면 일상 속에서 자동화의 미래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결국 한국과 일본정부는 차세대 로봇산업 시장에서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로봇세상의 샴페인을 엉뚱한 방향으로 터뜨렸고 국민의 부푼 기대를 다시 담기도 뭐한 어정쩡한 처지가 된 것이다.
◆자동화를 넘어선 로봇시장
한 사회에서 미래를 향한 이미지가 긍정적이고 다양하면 문화가 번성하고 꽃을 피운다. 반면에 미래 이미지에서 상상력과 활력이 떨어지면 그 사회의 문화는 쇠퇴한다. 그동안 로봇업계가 꿈꿔온 미래상은 너무 도식적이고 정형화됐기 때문에 변화하는 21세기 세상에 제대로 맞추지 못한 측면이 있다. 소비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첨단 로봇제품들이 로봇계의 고갈된 상상력과 빈곤한 미래의 이미지를 입증한다. 해결책은 로봇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로봇계가 일상 속에서 로봇의 활용가치를 자동화 서비스의 연장선에서 찾는다면 10년 후에도 큰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원인을 발견했으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 자동화를 넘어선 로봇기술의 가능성은 인간의 노동이 아닌 존재 자체를 대신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현재 로봇공학계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기술진보의 합일점은 결국 또 하나의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다. 만약 로봇이 단순한 심부름꾼의 단계를 넘어 당신의 감성과 행동을 그대로 표현하는 또 하나의 물리적 신체로 진화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은 서로 다른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편재성을 갖게 된다. 바쁠 때 몸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이 현실세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로봇이 자동화 도구를 넘어서 인간의 분신역할을 하는 도구로 활용되면 과거 인터넷, 휴대폰처럼 현대인의 라이프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올 잠재력이 있다.
로봇기술의 효용성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면 21세기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친환경 저탄소 성장과 경제효율 향상에 도움이 되는 신산업을 육성할 수 있다. 앞으로 정부와 로봇업계의 R&D정책은 기존 로봇자동화에 기반한 모델에 올인하지 말고 다원화된 로봇산업의 포트폴리오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아톰, 로봇산업에 저주를 걸다
아톰은 오늘날 한국, 일본의 로봇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문화상품이다. 만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데즈카 오사무가 60년대 TV만화로 소개한 우주소년 아톰은 매우 인간적인 로봇캐릭터로 많은 일본 어린이에게 깊이 각인됐다. 일본의 로봇업계가 지난 1990년대 후반 인간 친화형 로봇시장을 목표로 연구방향을 급선회한 게 가능했던 것도 아톰이란 문화적 코드를 일본인 누구나 공유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개발된 온갖 인간형 로봇들은 아톰을 만화 밖 현실에서 만나고 싶은 일본인의 꿈과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일본 열도에 몰아친 서비스로봇 개발붐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심각한 문제점을 낳기 시작했다. 누구나 어릴 적의 꿈이 실제로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흥분하고 열광한다. 허나 꿈에의 집착이 지나치면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기 쉽다. 언론매체에 소개된 귀여운 일제로봇 중에서 시장판매로 투자자에게 수익을 안겨준 사례는 사실상 전무했다. 처음부터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한 로봇제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도 실용화가 어려운 로봇제품이 매년 반복해서 전시되자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군사로봇, 무인자동차를 착실히 상용화하는 동안 일본은 인간과 같은 로봇이란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려 인력과 비용을 낭비한 꼴이 됐다. 요즘 일본 로봇산업은 세계경기침체와 엔화강세로 인한 수출감소로 유례없이 춥고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로봇업계는 아톰과 같은 로봇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제패한다는 순진한 꿈을 접지 않고 있다. 아톰 세대의 획일화된 로봇관이 21세기 로봇산업의 변신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데즈카 오사무도 자신이 아끼는 국민만화 캐릭터 아톰이 자국 로봇산업에 걸림돌(저주)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