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OBIZ+] Cover Story-국제 트허 분쟁 `불구경` 원천기술 잿더미 될수도

늘어나는 국제 분쟁에도 기업, 정부 “나 몰라라”

E-디스커버리(디지털 증거개시제)

 2008년 개정 형사소송법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 증거개시제, 즉 E-디스커버리가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증거개시제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 기업 조직 및 시스템 차원에서 대응이 전무하다. 문제는 국내법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기술 특허 침해와 관련된 국제 분쟁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입법기관과 기업들의 안일한 대처가 향후 기술 특허 무력화 등 기업 및 국가 경쟁력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2006년 2월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은 램버스가 제기한 삼성전자의 가격 담합 의혹을 인정, 삼성전자에게 관련 서류들을 모두 만들어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램버스는 재판 과정에서 삼성전자가 일부 중요한 문건에 대한 고의적 혹은 불성실한 행위가 있었다며, 이는 FRCP(Federal Rules of Civil Procedure)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9년 3월 유타 법정은 필립 M. 아담스&어소시에이션(이하 아담스) 대 아수스 사건(사건번호 2009 WL 910801)에서 아수스의 이메일 증거 훼손 혐의를 인정했다. 아담스는 자사가 보유한 플로피 디스크 결함 발견 기술을 아수스가 도용했으며, 아수스가 핵심정보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아수스는 당시 이메일 시스템은 아카이빙 기능이 없었으며, 장기적 보존이 요구되는 가치는 개인 임직원들이 판단, 개인 PC에 저장했다고 반론했으나 법정은 아수스가 증거 보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기술 특허 분쟁이라는 점과, 문서와 이메일을 포함한 데이터를 성실히 제출한 측이 승소했다는 점이다. 이는 2006년 12월 개정된 민사소송법에 의거, 소송 당사자 쌍방이 재판 개시 전에 디지털 자료 증거를 제출하고 이 제출된 증거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는 ‘증거개시제(E-Discovery)’에 따른다.

 원래 증거개시제(Discovery)는 실제 재판에 들어가기 전 공판준비절차 단계에서 소송개시 120일 이내에 쌍방이 모든 증거 자료를 제출하고 상호 검토하는 것이다. 이때 공개되지 않은 증거는 법정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증거개시제에 따라 재판 개시 전 소송 당사자 쌍방은 상대방이 제출된 자료를 사전에 검토하고, 불리한 측이 합의를 요청할 수 있다.

 ◇제출된 디지털 증거의 정확도가 소송 승패 좌우=디지털 증거개시제, 통칭 E-디스커버리는 증거 제출 범위를 디지털 자료의 영역으로 확대한 것이다. 업무 정보와 의사 교환이 이메일과 전자문서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디지털 데이터의 증거 제출 필요성이 높아진 데 따른다. 이 법에 따라 소송 당사자들은 소송이나 법적 분쟁 시 소송과 관련된 이메일과 전자문서 등 기업의 디지털 데이터를 제출해야 한다. 증거개시제와 마찬가지로 재판 시 상대방의 주장에 반박할 디지털 자료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해당 사안에 대해서는 법정은 상대방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즉, 얼마나 상세한 자료를 제출하느냐가 법적 분쟁의 승패를 가리게 된다.

 E-디스커버리를 포함한 증거개시제는 실제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쌍방간 화해 및 합의를 유도함으로써 재판 절차에 따른 비용과 리소스 낭비를 막고 기업 예산은 물론, 국가 예산을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업계 관계자들과 전문 분석가들은 일상 생활과 업무에 이메일을 포함한 디지털 데이터가 깊숙이 침투하고 있으므로 향후 E-디스커버리의 비중이 훨씬 더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법적 분쟁의 승패는 디지털 데이터에서 가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리한 판정을 위해 디지털 자료를 위변조해서 제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경우 상대방의 관련 자료로 위변조 사실이 드러나면 과징금은 물론 변호사는 징계를 받게 된다.

이처럼 미국이 2007년 민사소송부터 소송 당사자의 디지털 증거 자료 제출을 의무화하자 기업들은 E-디스커버리 솔루션을 기업 내 구축하거나 디지털 포렌식 기술을 보유한 대형 법률사무소를 찾고 있다. 심지어 가트너는 E-디스커버리를 ‘fired gun’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120일이라는 기한 내 방대한 기업 문건에서 관련 자료와 연관성을 추출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제출 자료가 소송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더욱 부담스러운 일이다.

 ◇국내 강제 없다고 국제 분쟁에 안일한 대처=E-디스커버리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독일 등 일부 유럽에서도 E-디스커버리 채택 국가가 늘어나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형사소송법에 일부 적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당 국가의 기업들은 방대한 기업 디지털 문서와 자료들 중 법적 분쟁 발생 시 정해진 기간 내 최대한 많은 자료를 추려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나아가 E-디스커버리를 기업 정보 관리 및 문서 관리 정책과 시스템에 포함시키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증거개시제의 의미와 기업의 법적 분쟁에 미칠 영향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또한 국내 형사소송법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인지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제 분쟁이다.

 현재 기술 특허 및 지적재산권 침해는 미국, 중국, 인도 등 국경을 넘어 발생하고 있다. 한 예로 최근 5년간 삼성전자의 주요 기술 및 특허 침해 분쟁은 △일본 샤프(2009년 6월) △중국 홀리커뮤니케이션(2009년 6월) △미국 램버스(2009년 2월) △미국 스팬션(2008년 11월) △대만 콤팰(2006년 11월) △미국 인터디지털(2005년) 등 대부분 국제 분쟁이었으며, 특허 시비는 점점 늘어나 2005년 8건이었던 해외 특허 소송 피소 건수가 지난해 25건으로 3배 이상 늘었다.

 명백한 기술 침해 사실이 있다면 모를까, 증거 자료 미비로 원고가 승소하게 되면 수억 달러의 로열티와 벌금, 소송 비용을 부담하는 억울한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비용보다 더 큰 위험이 존재한다. 바로 제품 판매와 기술의 무력화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증거 제출의 미비는 패소로 이어질 확률이 높으며, 패소할 경우 기업의 원천 자산이자 경쟁력인 기술 특허가 상실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해당 기업은 물론 국가 경쟁력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벌금과 보상, 상대방 변호사 비용 등 수억, 수십억대의 소송 비용 부담은 기업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더욱 큰 위협은 기업의 원천 자산이자 경쟁력인 기술과 지적재산권이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풀브라이트&요로스키(Fulbright & Jaworski L.L.P)의 ‘법적 분쟁 경향 조사 2008’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기업들은 막대한 법무 비용 지출보다 기술 및 트레이드마크 사용권 상실을 가장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래 매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제조, IT 분야 기술 침해 분쟁 증가=풀브라이트&요로스키는 2004년부터 매년 미국 및 영국 기업들의 법무팀을 대상으로 법적 분쟁 경향을 설문조사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 매출 10억 달러 이상의 상장 기업들 중 절반 이상이 기술 침해를 주장하는 소송에 휘말렸다. 특히 제조업체와 기술/통신 업계에서 이같은 경향이 두드러져 기업 규모에 상관없이 제조업체는 절반 이상, IT 기업의 30% 이상이 기술 특허 침해 소송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 기업은 막대한 비용 지출보다도 자사 상품 및 판매의 근원이 되는 특허 및 트레이드마크의 권리 상실을 더 큰 위협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과 영국 기업들의 법무팀이 서둘러 E-디스커버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국내 기업의 안일한 E-디스커버리 대처는 소송을 제기당하는 입장뿐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에도 소송 준비 비용과 시간, 정확도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게 한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2008년 기준 국내 기업 중 약 28%가 특허 소송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침해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특허 및 지적재산권 피해 규모는 전체 수출액의 6%에 이르며, 국가간 자유무역 협정이 확대되면 특허 분쟁은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당한 기술 특허와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음에도 해당 국가의 법정에 그 피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기술 의존도가 높은 IT, 바이오테크놀로지 및 기타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벤처들의 오랜 노력과 결실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 벤처이건 국제 특허 분쟁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대기업이건, 국내 기업의 E-디스커버리 대응 움직임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여전히 변호인단 인력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대형 그룹사 일부 계열사에서 검토 움직임은 있으나 아직 전면 도입한 곳은 없다. 심지어 해외 법적 분쟁에서 디지털 자료 미비로 패소, 뼈아픈 경험을 한 기업도 마찬가지다.

 ◇특허와 상표권 무력화로 미래 비즈니스 큰 타격=E-디스커버리 솔루션 업계와 법률 전문가는 “E-디스커버리의 중요성을 국제 기술 분쟁에 자주 휘말리는 대기업들도 인식하지 못해 심각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로는 E-디스커버리를 IT 컴플라이언스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부서는 기업 법무팀과 경영진이다. 하지만 글로벌 E-디스커버리 솔루션 업계가 IT 부서의 컴플라이언스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어 기업 경영진과 법무팀은 E-디스커버리를 IT 용어로 치부하고 있다.

 또 이메일 아카이빙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기업 법무 관점에서의 E-디스커버리 인식 확산을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E-디스커버리에 요구되는 디지털 자료는 원본이거나 원본과 동일성을 인정받은 자료가 법적 증거물로 타당성을 가진다. 따라서 디지털 자료의 원본을 그대로 압축 저장하는 아카이빙 시스템을 전제로 하며, 기업 내외부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메시지 수단인 이메일도 대상이 된다. 하지만 스토리지 효율성 측면을 부각시킨 이메일 아카이빙을 먼저 내세우다 보니 더욱 법무팀, 경영진과는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됐다.

 실제 분쟁에 휘말리는 대기업조차 E-디스커버리 시스템에 대해 무지하거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이유는, 대규모 법률사무소에 대한 의존 때문이기도 하다. 대기업들은 내부 법무팀과 변호사를 두는 한편으로, 대규모 법률사무소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앞으로 더욱 빈번해지는 법적 분쟁과 늘어나는 디지털 문건 속에서 E-디스커버리 시스템 없이 변호인단의 개인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 또한 매 법적 분쟁 시마다 문서 분석과 검토, 추출의 작업은 반복되고 비용 또한 되풀이해서 지급해야 한다.

 타네자 그룹은 E-디스커버리가 로펌에게는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다. 의뢰인의 방대한 데이터들을 검토, 분석해야 하는 변호사들에게 있어 E-디스커버리는 소송에 투입되는 시간을 크게 절감시켜줄 수 있다. 반면 기업들이 E-디스커버리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면 외부 법률사무소에 대한 의존도가 약해질 것이고, 법무 비용의 대부분은 변호사의 관련 자료 검토와 분석에서 발생하기에 법률사무소의 매출은 감소할 수도 있다.

 이는 원고 혹은 피고 신분으로 빈번하게 소송의 당사자가 되는 기업들이 E-디스커버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기 침체기에 법무 비용을 줄이고자 하는 기업들은 E-디스커버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내부 변호사를 영입함으로써 분쟁 때마다 외부 변호사에 반복적으로 지출해야 했던 막대한 법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IT부서보다 법무팀의 E-디스커버리 검토 필요=타네자 그룹은 E-디스커버리가 법률사무소의 매출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분명한 사실은 종이 서류와 디지털 자료를 포함해 방대한 기업 문건에서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유관 자료를 분석, 제출해내는 능력이 기업은 물론 법률대리인에게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수작업으로 할 수 있는 분석 작업에는 한계가 있고, 이는 승소률을 높이고 싶은 변호사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장기적으로는 승소률을 높이는 것이 훨씬 고수익이다. 타네자그룹은 따라서 앞으로 변호사들이 E-디스커버리 워크플로에 대한 전문성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08년 10월에 발표된 풀브라이트&요로스키의 2008년 법적 분쟁 경향 조사에 따르면, 2007년에 비해 오히려 E-디스커버리 논쟁이 줄어들었다. 2007년의 경우 2006년 민사소송법 E-디스커버리 적용에 따라 기업들은 관련 법무 인력을 고용하거나 외부 서비스를 검토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2006년 17%에서 2007sys 42%로 상승했다. 그리고 적용 3년째를 맞이한 2008년에 논쟁이 줄어든 것은 법무팀들의 E-디스커버리 필요성 인식이 크게 확산됐으며, 경기 침체 이후 소송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 미리 대비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또한 이 보고서는 “2008년말 현재 상황은 폭풍 전야”라며 “경기 침체로 인해 신용 문제, 금융 위기, 구조조정과 기업 파산, 정부 감사 등은 오히려 늘어났으며 조사 기업 34%가 회사에 제기될 수 있는 소송을 미리 준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법적 분쟁의 주요 당사자가 되는 미국 등의 기업이 앞서 준비할 때, 피고 혹은 원고의 입장이 될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유관 자료 누락 가능성이 높은 수작업에 의존한다. 기업 법무팀, IT부서,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들이 총동원된다고 해도 사람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이상 비용과 리소스 낭비, 정확도 결여의 함정은 여전하다. 리소스 투입의 효율성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체계적인 기업 문서 관리 정책에 따라 E-디스커버리스 시스템을 갖추고 누락 자료 없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대방 기업에게 승소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는 회의적이다.

 지식경제부는 지난해 12월 지식정보보안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기 위한 발전 비전 ‘Securing Knowledge Korea 2013’을 통해 300억원을 투입해 디지털 포렌식 및 윤리적 해커 등 지식정보보안 전문인력을 양성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E-디스커버리 시스템은 디지털 포렌식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술 벤처 보호와 국가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있다.

국가 입법기관과 행정부처가 우리 기업들이 보유한 기술과 지적재산권에 대한 다국적 기업들의 소송과 분쟁을 기업 차원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이상 더 이상 국가 경쟁력은 없다.

 박현선기자 hs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