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강자는 아니다. 요즘 전세계 자동차 업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GM, 크라이슬러의 파산에 이어 최근에는 포드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자동차 ‘빅3’의 영광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위기에 처했다. 금융위기로 소비자 지갑이 닫히면서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기업들이 퇴출을 면치 못하고 있다. 품질과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유연한 시장대응력이 생존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아시아의 맹주 도요타를 넘고 세계시장을 제패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치고 있다. 여기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시장대응력 확보를 목표로 내건 현대기아자동차의 글로벌 공급망관리(SCM) 전략이 자리잡고 있다.
◇SCM으로 도요타를 넘겠다=고유가 시대에도 고연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중대형 고급차 제품 구조를 고집했던 자동차 업계 거성들이 잇따라 몰락했다. 움직이는 시장에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지각변동의 위기를 틈타 현대기아자동차의 글로벌 SCM 인프라 구축은 더욱 가속을 내고 있다. 판매, 생산, 자재 공급에 이르는 엔드 투 엔드(End to End) SCM 경쟁력을 높이고 생산성 위주 SCM의 강자 도요타를 뛰어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현대기아차는 시장 수요의 변화를 즉시 생산에 반영하는 프로세스 혁신과 실시간 정보 전달을 위한 글로벌 표준 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 세계 대리점의 판매 정보 및 수요 현황이 시스템을 통해 본사로 전달돼 생산계획과 연결되도록 했다. 전 세계 법인과 공장을 하나로 잇기 위해 전사적자원관리(ERP) 등 주요 기간계 IT시스템의 표준화 및 통합도 추진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우선 시장 접점에 있는 전 세계 190개 수출국 중 70개 국가의 대리점 및 판매법인을 ‘판매용’ 거점에서 ‘수요예측’ 주체로 전환했다. 수출 물량 중 이 70개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90%에 달하는 만큼 사실상 수출 물량의 대부분이 전 세계 대리점 및 판매법인의 수요예측 정보에 맞춰 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또 3년 안에 2배 가까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해외 생산 물량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글로벌 SCM 시스템 인프라 강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수요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생산 유연성도 한층 높인다. 현대·기아간, 대량 양산용·소량 주문용차 생산방식간 교차 생산 능력을 강화하고, 엔진 및 변속기와 같은 부품 통합 할당을 통해 생산 실행력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수직계열화의 장점을 이용해 글로비스 등과 협력해 강력한 물류 네트워크와 가시성도 확보하고 있다.
전 세계 생산 및 판매법인 SCM 시스템 구축이 내년 말 완료되면, 글로벌 시스템 표준화 및 통합 을 거쳐 ‘글로벌 오퍼레이션(Global Operation)’ 단계로 진입할 계획이다. 최상철 현대기아차 ERP 추진실 상무는 “세계 어느 판매법인과 공장이든 자유롭게 교차 주문과 납품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 진정한 글로벌 오퍼레이션(Global Operation)을 실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5년간의 프로세스 혁신과 SCM 고도화=현대기아차는 2005년부터 대대적 PI 활동과 SCM 혁신활동을 추진해왔다. 생산성을 높이는 데 집중했던 예전과 달리 시장을 읽고 대처하기 위한 시장 대응 역량 강화에 집중했다. 기 구축된 생산 계획 위주의 SCM을 전면 재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1년 간의 프로세스 혁신 추진 방안 수립과 상세 설계를 마친 뒤 △시장 접점 수요 예측을 강화할 수 있는 수요예측 통계 기능 △국가별 대리점에서 본사까지 수요 정보가 연결될 수 있는 수요 계획 관리 기능 △빠른 납기 회답을 줄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한 새 SCM 시스템(APSⅡ)을 본격적으로 국내에 구축하기 시작했다.
국내 SCM 고도화가 마무리 된 2007년부터 해외 대리점의 판매무역시스템(Distributor Trading System)과 판매 법인의 ERP시스템에 판매 및 수요예측 정보가 입력되면 SCM 시스템과 연계돼 21개 지역본부 등과 협의를 거친 후 본사로 전달된다. 이후 본사의 해외 영업부에서 최종적으로 수요 계획을 확정, 이 생산량이 월·주단위 판매·생산 회의를 거쳐 각 공장으로 할당돼 생산 일정이 할당된다.
시스템 구축은 시작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전 세계 수요예측과 판매계획이 판매와 생산 할당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신속한 프로세스와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는 일이었다. 기존 본사 영업부에서 담당하던 수요 관리 업무를 각 국가별 현지 대리점으로 확산시킨 이유다. 최상철 상무는 “본사 영업팀이 총괄하던 판매 및 수요예측 정보를 국가별 대리점과 판매법인에서 관리하는 체계로 전환하고 이 정보가 최대한 빠르게 생산에 직결되도록 했다”며 “시장 접점의 국가별 대리점 및 각 판매법인 담당자가 직접 주문 및 예측 정보를 입력하도록 수요 입력의 주체를 소비자 접점으로 확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해외로 수출되는 국내 자동차 생산량 중 90% 이상이 국가별 대리점 및 판매법인 수요예측 정보에 입각한 생산계획 체제하에 생산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는 물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약 65% 수준이다.
◇글로벌 SCM 본격화, 미국에서 점화=현대기아차는 향후 3년 내 생산량 목표인 총 600만대 중 해외 생산량이 400만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올해 안에 해외 판매를 위해 현지에서 생산되는 물량이 국내에서 수출되는 물량을 초과할 전망이다. 이에 글로벌 생산 기지를 전 세계 판매법인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글로벌 SCM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2008년부터 미국 법인을 시작으로 SCM 시스템(APSⅡ) 구축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지난해 현대자동차 북미 판매법인과 앨러바마 공장에 시스템을 가동했다. 기아자동차 북미 판매법인과 조지아 공장도 오는 11월 시스템을 가동을 계획하고 있다. 앞서 이달에는 기아자동차 유럽 법인 슬로바키아 공장에도 SCM 시스템을 가동한다.
기아자동차 북미 판매법인과 조지아 공장간에는 서비스지향아키텍처(SOA)를 기반으로 생산공장·판매법인의 ERP시스템과 SCM을 연계해 판매부터 생산에 이르는 대단위 시스템 통합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김군섭 SCM 혁신팀 차장은 “ERP로 입력된 판매 정보 및 수요예측 정보가 SCM 시스템으로 전달돼 생산 계획이 수립되고 이 정보가 다시 조지아 공장의 ERP로 전달돼 재고 파악과 협력업체 발주 등으로 이어지도록 했다”며 “ERP와 SCM간 자유로운 정보 교환이 일어나 통합적 가시성이 확보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지아 공장의 ERP는 구매협력시스템인 바츠(VAATS)와도 연계돼 협력업체의 생산 가능 현황 및 자재 정보까지 파악, 이 정보가 다시 생산계획에 반영된다. 판매법인의 ERP에서도 재고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통합적 시스템 인터페이스를 갖춘 것이다. 이렇듯 SOA를 기반으로 ERP와 타 시스템을 연계하는 시스템 통합 프로젝트가 전 세계 시스템 통합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최 상무는 “통합 SCM 시스템과 수요 관리 프로세스 체계를 확립해 판매 예측 정보를 받아 생산계획까지 일주일 만에 연결되는 프로세스를 정착시켰다”고 말했다. 실제 이러한 수요 관리 강화와 빠른 대응력이 불황기에도 미국 시장에서 현대기아차를 성장시키는 주요 동인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내년도에는 현대 유럽 법인을 비롯해 터키, 인도, 중국 공장에 시스템 구축을 확산해 내년 말 글로벌 SCM 시스템 구축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전 세계 공장을 하나의 공장처럼=자동차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약 3000개의 부품 및 조립품, 반제품이 존재한다. 일부 부품의 자재 조달 기간이 5개월이 이르는 등 매우 길기 때문에 확보 가능한 자재 내역 내에서 빠르고 효과적으로 생산해 납기에 대응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최 상무는 “빠르게 증가하는 해외 생산 물량의 적기 대응력을 확보하기 위해 북미와 유럽 등지역의 현대·기아간 교차 생산을 확대할 계획”이라며 “소량 주문차를 위한 BTO(Build To Order)방식과 대량 양산용 차를 위한 MTS(Make To Stock) 방식간 교차 생산력도 강화해 빠른 납기를 실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생산 주도 방식이 지배적일 때는 대부분의 제품을 MTS로 생산했지만 수요 주도 방식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적시적소 수요에 최적화된 교차 생산 역량이 더욱 중요해졌다. 엔진, 변속기 등 생산 계획 일정을 못 맞추게 하는 일부 부품에 대한 통합 할당 계획도 중요해졌다.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SCM 시스템 구축이 내년 말 완료되면 시스템 통합 과정을 거친 후 ‘글로벌 오퍼레이션(Global Operation)’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 상무는 “향후 국내에서 해외로 수출되는 물량 뿐 아니라, 해외 공장과 법인간 물류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일이 중요해지고 다 지역간 스케쥴 및 플래닝이 요구될 것”이라며 “마치 한 국가의 한 공장처럼 같은 시스템과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갖추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