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휘몰아치는 `게키야스 열풍`

[글로벌 리포트] 휘몰아치는 `게키야스 열풍`

 일본의 경기불황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TV나 신문에는 연일 ‘불황(不況)’이라고 적힌 단어가 눈에 띄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다. 불황으로 하루아침에 공원 노숙자 신세가 된 파견사원 인터뷰는 더 이상 화젯거리가 되지 못한다. ‘100년 만에 찾아온 대불황’이란 표현까지 심심찮게 나온다.

 일본의 경기불황과 함께 TV나 신문에 자주 쓰이는 단어가 등장했다. 바로 ‘게키야스(激安)’다.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염가’ 정도가 될 것이다. ‘염가 투어’ ‘염가 요리’ ‘염가 슈퍼’ ‘염가 런치’ 등 저렴한 물건, 혹은 이를 판매하는 곳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TV와 신문과 같은 미디어뿐 아니라 상점가의 간판이나 세일을 알리는 전단에서도 이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990엔 초저가 청바지 등장=일본에서 중저가 캐주얼 의류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주저 없이 ‘유니클로’를 꼽는다. 이 유니클로에서 브랜드 ‘지유(G.U.)’를 선보였다. 중저가 브랜드로 명성이 자자한 유니클로에서 훨씬 더 저렴한 가격의 캐주얼 의류 브랜드를 론칭한 것이다.

 첫 작품이 바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990엔 청바지’다. 물가 비싸기로 소문난 일본에서 990엔(약 1만3000원)짜리 청바지가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다. 중저가 브랜드로 일본에서 입지가 굳은 유니클로의 네트워크와 유통채널, 그리고 디자인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제품이다.

 물론 유니클로처럼 품질을 유지한 채 가격을 낮추기란 쉽지 않다. 소재에서 유니클로와 지유는 차이가 있다. 유니클로가 일본 원단을 쓴다면 지유는 중국에서 수입한 원단을 이용하는 식이다. 생산지도 일본이 아닌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생산 후 수입해 오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지유는 990엔 청바지 판매 호조로 이 상품의 올해 판매 목표를 애초 목표의 두 배인 100만벌로 상향 조정했다. ‘세븐&아이홀딩스’의 슈퍼 ‘더 프라이스’에서는 지유의 990엔 청바지에 대응해 10엔 인하된 980엔 청바지를 판매하고 있다.

 ◇명품 백화점도 염가 마케팅=백화점 업계도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게키야스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창업 140년을 자랑하는 마쓰야 백화점. 초고가 브랜드 밀집지역인 도쿄의 긴자 점포에서 얼마 전 9800엔 양복을 선보였다. 200벌 한정이긴 했지만 98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 때문에 판매 개시 당일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9800엔 양복 외에도 실크 소재의 양복 2벌에 2만9800엔, 이탈리아제 울을 사용한 양복은 2벌에 3만9800엔으로, 양복 전문 카테고리 킬러로 유명한 ‘아오야마’나 ‘더 슈트 컴퍼니’보다도 싸다. 유럽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원단을 배를 이용해 운송함으로써 구입비용과 운송비용을 대폭 절감한 것이 비결이다.

 먹을거리에도 게키야스 물결이다. 나고야에서 압도적인 지명도를 자랑하는 백화점 마쓰자카야는 얼마 전 전국의 마쓰자카야 점포에서 500엔 점심 도시락을 발매했다.

 고급 이미지가 강한 마쓰자카야 같은 백화점에서도 불황의 여파를 뛰어넘기 위해 500엔 도시락을 발매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500엔짜리 동전 하나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점심을 ‘원코인 런치’고 부르는데 이 붐이 고급 백화점에도 들이닥친 것이다.

 ◇전문 방송 프로그램도 인기몰이=백화점에 이어 체인 슈퍼마켓 업체에서도 저렴한 도시락 판매에 뛰어들었다. 손이 많이 가는 도시락의 특성상 기존에는 개당 400∼500엔의 가격이 보통이던 것이 최근 들어 세이유를 중심으로 더 저렴한 도시락을 내놓고 있다.

 세이유는 지난 4월부터 일본 전역에 있는 373개 점포에서 298엔의 초저가 도시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농가와 직거래해 도시락에 사용되는 재료 가격을 낮추고, 또 재료 양도 조금 줄여 탄생한 것이 바로 298엔 도시락이다.

 일본 내 유명 슈퍼체인인 세이유의 이러한 행보에 자극을 받아 ‘이온’이나 ‘이이다’ 같은 업체에서도 저가 도시락이나 이에 상응하는 효과의 제품가격을 속속 인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게키야스붐으로까지 이어지며 급기야는 싼 곳만 전문으로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까지 제작됐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게키야스 버라이어티’다. 지난 6월부터 저녁 7시 55분에 시작해 1시간 동안 TBS에서 방송되고 있다.

 생활정보 프로그램을 표방한 게키야스 버라이어티는 값싼 제품이 많기로 소문난 지역을 방문해 3명의 MC가 각각 먹고, 입고, 구경하면서 제품을 소개하는 컨셉트다. 음식, 패션, 여행 등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자동차·가전까지 염가 열풍 확산=게키야스 열풍은 자동차 산업에도 몰아쳤다. 2009년 초에는 혼다의 하이브리드차인 ‘인사이트’가 동급 보통차량과 가격차이를 대폭으로 줄인 189만엔이라는 가격에 판매를 시작하며 돌풍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지난해보다 대폭 낮아진 가격에 고연비 차량이라는 장점 때문에 주문이 쇄도했다. 여기엔 정부의 하이브리드카 보조금 지급 정책이 한몫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구입 후 13년이 지난 자동차를 폐차하고 하이브리드카로 교체하면 25만엔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뒷받침으로 6월에는 도요타의 대표적인 하이브리드카인 ‘프리우스’가 경차를 제치고 판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이브리드카 보조금 정책은 비단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전제품 업계에도 해당된다. 정부는 소비 진작을 유도하기 위해 에너지절약형 가전제품 구입 시 보조금 형태로 ‘에코포인트’를 지급할 예정이다. 에코포인트는 현금화할 수 없는 일종의 포인트 제도로 지역 특산물, JR 등의 교통 이용권 그리고 상품권 등의 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현재 관계 부처와 협의 중이다.

 에코포인트가 적용된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판매가에서 10∼20%의 가격 인하 효과를 볼 수 있다. 현재 가전제품 양판점에서는 정부의 보조금 정책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보조금 적용에 따른 가격 인하 효과를 극대화한 판매전략 수립에 분주하다. 일본에서 가전제품을 구입할 계획이 있다면 지금이 최적기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불황으로 야기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시행되고 있는 일본, 특히, 게키야스로 통용되는 저렴한 가격 제품의 출현이 불황을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비자에게 품질 좋고 값싼 제품을 살 기회가 늘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도쿄(일본)=김동운 태터앤미디어 일본 블로거(doggul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