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전 대통령측이 21일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40쪽 분량의 소책자로 펴낸 DJ의 올해 일기에는 말년에 느낀 삶에 대한 단상과 함께 전직 대통령으로서 갖는 시국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다.
친필 메모 형태로 기록된 이 일기에는 생을 마감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한 듯, 85년 파란만장한 여정을 반추하며 후세에게 남기는 ‘잠언’들이 눈에 띄었고 건강 문제와 한평생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에 대한 애틋한 감정 등도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DJ측은 DJ의 서거가 국민통합의 계기가 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현 정부 비판 등 시국인식 관련 부분은 극히 일부만 공개했다. 사적인 부분도 공개대상에서 빠졌다.
◇인생역정 회고=DJ는 85세 생일을 맞은 1월6일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며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선 “감사하고 보람있는 생애”라고 자평했다.
1월7일에는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했고, 1월15일에는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며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5월2일 일기에서는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며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잠언’을 남겼다. DJ는 ‘색깔론’, ‘비자금 의혹’ 등 생전 자신을 따라다녔던 꼬리표에 대한 억울함도 호소했다. 그는 2월4일 검찰이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비자금 의혹 제기와 관련, ‘DJ는 관련없다’고 밝힌데 대해 “너무도 긴 너무도 긴 세월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에는 법적 심판받을 것”이라고 했다.
◇건강 문제=DJ는 “10시간 세배를 받아 몹시 피곤했다”며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주력해야겠다”(1월1일)는 다짐으로 올해를 시작했다.
“신장을 안전하게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리의 힘이 약해져 조금 먼 거리도 걷기 힘들다”(3월18일),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4월27일)”,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5월20일) 등 투석치료에 대한 고통도 담겼다.
그러면서도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라며 “끝까지 건강을 유지해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문제의 3대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4월27일)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건강 악화로 일기를 중단하기 직전인 6월2일에는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정희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 치료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일기장 곳곳에는 ‘찬미예수 건강백세’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아내 사랑=그는 1월11일 일기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한강변을 드라이브하며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라고 했다. 이어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의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다”면서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고 이 여사에 대한 고마움과 애뜻함을 표했다.
“하루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2월7일), “살아 있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5월2일)는 등의 글귀도 있다.
◇현 정부 비판=DJ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던 5월29일 일기에서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앞서 1월 20일에는 용산 참사 과잉진압 논란과 관련, “참으로 야만적 처사”라며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고 술회했다. 1월17일 일기에선 ‘다시 한번 대통령 해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등 자신의 신년 외신기자 클럽 기자회견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을 소개하며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며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1월16일에는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盧 서거=4월18일 일기에는 노 전 대통령 주변인사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 “큰 불행”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담겼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23일 일기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슬프고 충격적”이라는 비통한 심경과 함께 “검찰이 마치 소통작전을 하듯 공격하고 언론플레이를 했다”며 검찰 수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풀어냈다. 5월24일 일기에선 측근인 박지원 의원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으니 국민이 바라는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가족들을 설득한 뒷얘기도 소개됐다.
◇대북 관계-클린턴 부부와의 만남=그는 5월25일 일기에서 북한의 2차 핵실험과 관련,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면서도 미국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서도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 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며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고 우려했다.
북한 동향과 관련, “6자 회담 복구하되 그 사이에 미국과 일대일 결판으로 실질적인 합의를 보지 않겠는가 싶다”(5월25일)고 내다봤다.
DJ는 또한 지난 2월과 5월 방한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와의 전화통화를 언급, “나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표명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자평했다.
방한 중인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 한 5월18일 일기에서는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며 “언제나 다정한 친구”라고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이날 일기에는 DJ가 클린턴 전 대통령을 통해 부인인 힐러리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문서 등 대북 정책 조언이 담긴 메모를 전달했다는 내용도 소개됐다.
◇인간적 면모=그는 설날인 1월26일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받는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생애 마지막 고향 방문길이 돼버린 하의도 방문에 대해 “모교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고 행복해 하는 내용(4월24일),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며 동교동 자택 마당에 핀 영산홍과 철쭉꽃을 소개하는 내용(5월1일) 등도 담겨 있다. 앞서 DJ는 2월17일 명동성당에 안치된 고(固) 김수환 추기경 시신 앞에 조문한 뒤 “평소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며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