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 차 방한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일행이 23일 청와대를 예방하게 됨에 따라 1년6개월여 경색기를 보낸 남북관계에 전환점이 마련되리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돌변한 대남 태도에 ’진정성’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따라서 일단 바닥을 친 듯한 남북관계가 앞으로 개선될 공산은 크지만 급속한 진전을 보일지, 걷다 서다를 반복할지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北 고위급 인사 청와대 예방 상징성 커 = 올해 상반기 김정일 국방위원장 수행 횟수에서 최다를 기록한 김기남 비서나 명실상부한 대남 실세이자 김 위원장 최측근인 김양건 부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는 것은 그 장면 자체만으로도 상징성과 극적 효과가 크다는게 중론이다. 북한은 현 정부 출범 이후 6.15, 10.4선언 이행에 대한 미온적 입장과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발전을 연계한 비핵.개방 3000 구상 등을 문제삼으며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해왔기 때문이다.
북은 이명박 대통령을 ‘역도’로 칭한데 이어 올해 들어서는 전면적 대결태세 진입, 정전협정 불구속 선언 등으로 정부를 압박해왔고 정부도 ‘북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태도변화를 기다린다’는 원칙으로 맞섬에 따라 남북간 갈등지수는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북한은 그러나 지난 4~5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이후 불과 3개월전 핵실험(5.25)을 전후한 남북관계 긴장이 언제 일이었나 싶을 정도의 평화공세를 시도하고 있으며 이번 행사는 그런 북한의 행보 중 하이라이트로 보인다. 그런 만큼 조문단의 이 대통령 예방은 바닥을 친 남북관계가 정상화의 길로 가는 ‘변곡점’으로 외부에 비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앞서 북한은 10~17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평양 초청, 13일 억류 근로자 석방, 17일 현대와의 금강산.개성관광 재개.이산가족 상봉 등 5개항 합의, 21일 육로통행 제한 등을 담은 12.1 조치 해제 등 자기들 입장에서 대남 유화적인 조치들을 잇달아 내놨다.
◇무엇을 이야기할까 = 김기남 비서는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친서’ 휴대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남북관계의 전면적인 개선과 그것을 위한 당국간 대화 재개 등에 대한 김 위원장의 의지가 메시지에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동국대 고유환 교수는 22일 “북측 입장에서 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어떤 협의를 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주로 김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 것”이라며 “그럴 경우 거꾸로 이 대통령도 그러한 모종의 ‘회신’을 할 수 있기에 간접적인 정상간 대화가 이뤄지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고 교수는 “다만 북측은 그간 누차 당국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해온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이행 문제 등에 대해 재차 언급할 가능성이 있으며 ‘핵문제는 남조선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는 논리를 들 수도 있을 것”이라며 북측이 핵문제를 남북관계 진전에 연계한 ‘비핵.개방 3000’을 우회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달 30일 나포된 우리 측 어선 ‘800 연안호’ 송환과 금강산 관광 재개문제 등 세부 현안들은 이미 22일 현인택 통일장관과 북측 인사들간의 회동에서 일정한 의견조율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 대응 주목 = 이런 북한의 대대적인 평화공세에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도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북측이 22일 오전 청와대 예방의사를 밝혔음에도 당일 예방토록 하지 않고 외국 조문사절단의 예방일정이 잡혀있는 23일 짧게 청와대를 방문토록 한 것은 북한의 대대적 유화 공세가 제스처일뿐, 진정성은 떨어진다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는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즉 비핵화 진전의 속도에 맞춰 남북관계를 전개한다는 정부의 ‘원칙’은 확고한 만큼 이에 대한 전향적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 북한의 평화공세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 남북관계가 급격히 전환하는 모양새가 연출될 경우 여론 일각에서 제기될 수 있는 경계심리 등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북이 이번에 조문단 파견을 협의하면서 정부를 배제하고 김대중 평화센터하고만 소통한데 대한 정부의 곱지 않은 시각도 ‘청와대 예방’ 이벤트를 가급적 차분하게 치르려는 배경의 하나로 꼽힌다. 이 같은 기류로 미뤄 이번 북한 조문단의 청와대 예방 이후 정부가 대대적인 대북 접근으로 화답하기보다는 북핵 진전 상황을 봐가며 남북관계의 속도를 조절해 나갈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또 북한이 강조하는 ‘6.15, 10.4선언’ 존중 및 이행 문제에 대한 남북 당국 간 입장차 해소에 일정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북측 조문단의 방남을 계기로 당국간 첫 고위급 대화(현인택-김양건)가 이뤄지고 북한 고위 인사의 청와대 예방이 성사된 것은 그 자체로 향후 남북 당국간 대화의 정상화 측면에서 의미있는 진전이라는 견해가 많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