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이슈]미래기술전략지도

[이머징이슈]미래기술전략지도

 중요한 고객에게 발표를 하러 회사를 나선 J씨. 노트북을 확인해 보니 아차, 밤 늦게까지 발표준비를 하다 충전하는 걸 잊었다. 하지만 J씨는 걱정하지 않는다. 가방에 부착된 필름형 태양전지 패널로 간단하게 충전하면 되니까. 날씨가 흐리다 해도 괜찮다. 매점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메탄올 카트리지를 구입해 다 쓴 카트리지와 교환해도 되니까. 매점에 온 김에 휴대폰도 충전한다. 식물소재로 만든 생분해성 소재로 다 쓴 후에 땅에 묻으면 썩어 자연으로 들어가는 전화기다. J씨는 알콜로 만들어지고 수소로 발전하는 다이렉트 메탄올 연료전지를 사서 휴대폰에 넣으며 생각한다. ‘이제 발표준비 완료다.’

 

 지구와 에너지, 환경기술이 만나 에너지와 국민생활을 바꾼 2025년 일본 사회의 단면 중 하나다. 우리나라가 바라는 미래와도 상당 부분 겹친다.

 보통 우리가 일본 등 선진국을 벤치마킹할 때 그들이 지향하는 ‘무엇’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일본은 2025년이면 메탄올 연료전지를 상용화하려 하는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그들이 하려고 하는 ‘무엇’만큼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는 방법이다.

 즉 선진국이 어떤 비전에 입각한 특정한 모습의 미래를 달성키 위해 언제까지 얼마를 들여 기술을 개발하고, 어떤 단계를 거쳐 거기에 도달하는지 역시 중요한 벤치마킹 대상인 것이다. 수필가 이희승이 꿈과 이상의 차이를 실현 가능성에서 찾았듯 도달할 방법이 없는 미래는 허황된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략지도와 기술로드맵=어떤 국가가 도달하려는 미래 모습(무엇)은 ‘전략지도’다.

 전략지도는 경영학의 대가인 캐플란과 노턴이 개발한 것으로 조직의 목표가 제대로 시행되고 성과로 연결되는 모습을 설명하는 개념적 틀이다. ‘재무’ ‘고객’ ‘내부프로세스’ ‘학습과 성장’ 등의 관점에서 조직의 전략적 목표를 통합,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전략의 체계화와 전략 실행 사이에 연결이 끊어진 곳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전략지도로써 조직이나 국가의 전략을 간결하면서도 종합적인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전략지도가 ‘보스가 보는 것을 부하들도 볼 수 있도록 하는 지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전략지도를 차례대로 달성해 가는 방법은 ‘기술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로드맵은 모토로라와 IBM 등에서 사내 연구개발·제품개발의 지침으로 작성한 것이 원조로 기술개발의 전략적 중장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이정표다. 핵심기술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기업 및 산업계 기술전략 수립 지침을 제시한다. 기술개발투자 결정 시 안내지도 역할을 해 위험요소를 줄이고, 해당분야의 산·학·연·관 전문가가 비전을 공유하고 중요 기술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도 기술로드맵이다.

 최근 미래 유망기술의 확보 여부가 경쟁력의 원천으로 등장함에 따라 전략지도와 기술로드맵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미래 첨단기술의 개발·선점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 핵심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기술로드맵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일본 경산성 기술전략지도=최근 ETRI와 본사는 일본 경제산업성(METI)의 ‘기술전략지도 2008’을 번역해 ‘미래기술 전략지도 2025’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기술전략지도는 METI가 기술 분야 국가전략 시나리오에 기반을 두고 중요기술을 도출, 해당 기술 목표를 제시하기 위해 매년 개정, 발표하는 기술로드맵이다. 2025년까지 일본이 그리는 미래가 오롯이 담겼다.

 METI는 스스로 이 책을 ‘일본의 신산업 창조, 선도사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주요 기술의 최종목표, 제품·서비스 수요 등을 창출하기 위한 정책 조감도며 나침반 역할을 수행하는 내비게이터’이자 ‘21세기 신산업을 창도하기 위한 산관학의 공통 시나리오 또는 R&D 매니지먼트를 위한 정책 인프라’라고 설명한다. 정보통신, 나노기술·부품재료, 시스템, 바이오테크놀로지, 환경, 에너지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부분의 첨단기술 로드맵을 2025년이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했다. 일본이 미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는지 자세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기술전략지도의 출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우리에게 일본은 최근 수십년간 기술 분야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자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서야만 할 선진국이다. 우리나라도 우리 나름의 기술전략지도를 그리고 있을진대 양국의 그것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냉철하게 일본과 우리의 미래상을 가늠하고 우리 기술이 발전할 방향을 도출할 수도 있다.

 ◇한국에도 적용되는 일본 기술성적표=이런 관점에서 전문가들은 기술전략지도를 기반으로 우리나라와 일본 기술분야의 국제경쟁력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품·재료, 설계·제조·가공, 우주·항공 분야, DB·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장비 등은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해 국가적 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분야라는 것이다. 특히 기기 및 시스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재 대일역조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품·소재 분야 R&D 체계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물론 우리나라가 앞서 있거나 동등한 수준으로 보이는 분야도 많다. 반도체의 범용메모리 분야, 플라즈마 패널, 휴대단말 등 이용자 기기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바이오 의료분야, 재생의료 분야 및 나노 테크놀로지 분야 등에서도 활발한 연구개발 활동이 진행돼 국제적 수준에 근접해 있다는 평가다.

 일본 미래전략이자 기술성적표지만 한국에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셈이다.

 ◇전략지도 작성 프로세스 자체도 교훈=내용도 내용이지만 METI가 기술전략지도를 작성하고 운영하는 방법 자체도 우리나라가 배울 점이 많다. 일본은 공감대가 형성된 분명한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 종합적이고 중장기적 시각에서 수백명의 동종·이종 분야 관련 전문가와 연구자들이 매년 수정을 거쳐 기술전략지도를 지속적으로 보완·발전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 연구기관, 기업의 기술전략지도 활용을 촉진하기 위해 구축, 공개한 ‘가모메(Kamome:갈매기)’라는 기술전략지도 검색시스템이다.

 단순한 키워드 검색이 아니라 문장 등 의미구조를 이용한 이용자 중심의 고도검색시스템이다. 이로써 기술전략지도를 보완하고 개정할 때 다양한 검색 내용이 정책 형성과정에 반영된다. 2005년 20개 분야로 시작된 기술전략지도가 2008년까지 29개 분야로 매년 확장된 것도 기술전략지도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반면에 우리나라 중장기 기술전략은 상대적으로 일회적이고 단기간에 집중적인 작업을 거쳐 기획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정책기조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중장기 기술비전과 정책이 마련되는 일이 허다하다. 미래 비전에서 상호 공감대가 부족하고 개별분야 관점에서의 접근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현창희 ETRI 기술전략본부장은 “기술·산업의 융·복합화와 기술 분야에서 혁신을 적극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정책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미래 비전 공감대를 확보해 나가도록 기술 및 산업별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최순욱기자 choisw@etnews.co.kr

 

 □ 현창희 ETRI 기술전략본부장 인터뷰

 이번에 처음으로 일본 기술전략지도의 내용까지 완전하게 국내에 소개한 건 온전히 ETRI의 공이다. 일본 기술전략지도를 참고해 이를 뛰어넘는 종합적 시각의 기술개발전략지도를 만들어보겠다는 뜻이 담겼다. 번역·발간을 진두지휘한 현창희 ETRI 기술전략본부장을 만나 발간 의미와 소회를 들었다.

 -미래기술전략지도 발간 의미는.

 ▲일본의 기술전략지도는 한마디로 출구전략(기술 사업화, 산업화)을 의식한 종합적인 연구개발 전략지침이라 할 수 있다. 미래 시장수요를 염두에 둔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추진, 개별영역의 융합과 R&D 거점 형성, 부처 간 협조, 국제표준화 등을 유기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산업기술 정책 설계도인 셈이다. 우리의 중장기 산업기술 연구개발 정책수립과 전략입안의 준거 틀이 됐으면 하는 연구자적 판단에서 경제산업성 기술전략지도를 발간하게 됐다.

 -번역, 발간 과정에서 느꼈던 점이 있다면.

 ▲‘미래기술 전략지도 2025’는 8개 영역 29개 분야 145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우리나라도 미래기술전략의 적극적인 비전과 전략 로드맵은 그리고 있지만 일본과 같이 ‘기술전략지도 설계’라는 하나의 컨셉트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4∼5년 동안 관련 전문가 700∼800명이 동원돼 지속적으로 보완·개정하면서 그랜드 디자인을 하는 종합적 관점의 산업기술 정책 설계도는 나오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부의 관련 정책구상 및 자원배분 그리고 평가, 학계 및 연구자의 연구개발 프로젝트 기획, 산업계의 미래 전략 비즈니스 수립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종합적인 미래기술전략지도를 만든다면 ETRI의 역할이 클 것이다.

 ▲한 국가의 기술전략지도는 주요 산업기술 분야의 기술 및 시장 동향을 중장기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중요도가 높은 핵심기술을 제시함으로써 국가 차원에서의 R&D 경영 및 정책 인프라 역할을 한다.

 또 연구개발에 산·학·연·관의 지식공유와 종합력을 결집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이다. 향후 전문화되고 있는 기술과 산업, 융·복합화 되면서 더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시장 및 사회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이업종 간 연계 및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현할 수 있는 오픈 R&D 관련 시책의 추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TRI에서는 ‘미래기술 전략지도 2025’를 준거 틀로 정부 및 유관기관, 산업계 및 학계 전문가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일본의 기술전략지도에 손색이 없는 우리의 기술전략지도 설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