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만화를 제외한 일반 역사만화는 역사교과서와 다르다. 역사의 객관적 전달보다는 현재의 어떤 상황을 역사에 투영해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핵심 목적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정서를 읽어내고 그것을 절묘하게 역사 상황 속에 비유적으로 녹여내는 것이 훌륭한 사극의 판단 기준이다. 특히 순수예술의 미학적 몰입으로 편협해지지 않고 대중과의 호흡을 무엇보다 중시해온 만화 장르라면 더욱 그렇다. 만약 독재 말기라서 일상적 억압의 갑갑함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권력자의 부패, 실제로는 무관심하면서도 민생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들, 억압받는 국민, 저항하는 영웅 같은 요소들이 쉽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요소 자체만으로는 별로 감흥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요소를 제대로 묶어주는 핵심 정서다. 바로, 분노다.
이두호의 ‘덩더꿍’은 성인만화잡지 ‘주간만화’에 1987년부터 연재된 작품이다. 어떤 시대 분위기인지는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으리라. 조선사극 전문작가답게 이 작품은 조선 세조 당시의 관료사회를 무대로 하고 있다. 왕의 권세를 업고 수탈을 일삼는 부패한 고위 관료 홍성윤(실존인물 홍윤성을 모델로 함), 그리고 그에게 여러 번 짓밟히다가 결국 분노하고 일어나 그를 살해하는 주인공 장독대의 이야기다. 관조적 분위기로 흘러가는 많은 다른 사극과 달리, 독대는 모든 것을 순리로 받아들이며 한으로 삭이는 것에 실패한다. 또 그는 거사를 결행하면서 세상을 뒤흔들어 새 세상을 열겠다는 포부로 다가서지 않는다. 그런 식의 접근을 한 작품 속의 또 다른 인물은 오히려 비참하게 실패했을 정도다. 독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도저히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분노며, 그것 하나에 의지해 결국 일을 감행하고 성공한다. 적당히 적응해 복종하며 살기도 해보았고 그저 피하려고도 해보았으며 종교적 수양으로 받아들이고자 하기도 했으나, 결국 계속 짓밟혔기에 유일하게 남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거치고 결국 최종판단으로서 남겨진 분노에는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억압됐으나 아직 터질 정도로 발동이 걸리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 공명한다. ‘덩더꿍’은 그 점을 더할 나위 없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뚜렷하게 그려낸다. 최선, 아니 유일한 선택지로서의 분노와 그에 따른 저항 행동은 당대 현실사회의 역사적 사건과 겹쳐진다. 당시 일어나 거리로 나온 수많은 이들은 민주사회에 대한 치열한 이론적 고민의 결과 일어난 것도 아니고(물론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향후 더욱 복잡해질 세상의 비전을 뚜렷하게 합의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눈이 뒤집혀서 난동을 피우고자 한 것도 아니다. 얌전히 사육당하는 생활을 포함한 오랜 기간 축적한 경험의 결과, 이때 분노하고 일어서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기에 거리로 나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감격적인 이상사회가 구현된 것은 아닌데다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혼자 납득해버린 수많은 이들이 보수-수구 진영으로 전향하기도 했지만, 역사가 반 보 정도는 진보했다고 축하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으리라.
‘덩더꿍’은 작가가 원래 다른 작품에서도 민중을 향한 애정을 듬뿍 표현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진보 운동 성향을 보이거나 사회적 저항을 역설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부패하고 악독한 악인을 죽이는 카타르시스가 줄거리의 중심이라고는 해도, 최종 선택지로서의 정당한 분노에 대한 옹호가 시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잘 만들어진 역사만화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역사를 보여주는 셈이다. 현재에 대한 교훈 속에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역사 전반의 특성처럼, 오늘날에는 어떤 방식으로 분노를 이야기하고 판단하고 공유해야 할지 화두를 던져주면서 말이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만화비평웹진 ‘두고보자’ 창간 편집장 capcold@capcol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