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단가인하 압력을 목적으로 신용평가회사에서 중소·벤처기업의 부품원가와 구매일자 등 사실상 핵심 기밀이 담긴 신용평가 등급서를 제공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소·벤처업체의 사활이 달린 기업기밀 정보를 대기업이 우회 입수하는 것에 대한 논란과 아울러 해외 경쟁사로 넘어가게 되면 치명적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28일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대기업들은 납품계약 과정에서 제품 원가명세서 공개를 하지 않는 중소·벤처기업에 신용평가회사의 신용평가등급 확인을 거쳐 주요 정보를 파악하고 있다. 이는 벤처기업협회가 업계와의 간담회 과정에서 확인됐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이 방식을 이용한다는 설명이다.
벤처기업협회는 최근 이 같은 문제점이 드러나자 공정거래위원회·금융위원회·전국경제인연합회 등에 ‘중소벤처기업 신용정보 과다노출에 대한 개선요청’ 공문을 보내고 시정 조치를 요청했다.
협회가 공개한 사례에 따르면 신용평가회사들은 신용평가 명목으로 제품원가명세서·주요매입처 등의 정보 기입을 기업에 요청하고 이 정보를 신용평가등급 확인서를 통해 대기업에 전달하고 있다.
실제로 전자신문이 확인한 모 신용평가회사 등급확인서에는 최근 1년여간 주요 매입처의 공급가액과 거래비중을 담은 ‘전분기 주요매입처’와 원재료비부터 복리후생비·운임·수선비·임차료 등을 바탕으로 계산된 당기총제조비용을 확인할 수 있는 ‘제조원가명세서’가 포함돼 있었다. 제조원가명세서는 3개년치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신용평가회사 측은 이들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기업은 제대로 신용등급을 받기 힘들 것이며 정보 공개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시각이다. 한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는 제조원가명세서에 대해 “복리후생비는 늘어나고 재료비가 감소한다면 (등급산정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제조원가명세서는 평범하게 제출하는 서류며 대기업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제공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소기업계의 시각은 다르다. ‘기술탈취’에 해당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구매 담당 전문가라면 원가명세서상의 매입처 정보면 충분히 기업 실상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가 명세를 알려주는 것은 협상 카드를 다 공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같은 행태에 대해 진상파악 의사를 내비쳤다. 조근익 공정위 하도급개선과장은 “대기업들이 왜 신용평가회사에서 정보를 받는지 알아봐야 한다”며 “법률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