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가 돼도 아직 어둑하다. 따뜻한 햇살이 몸을 감싸주는 낮과 달리 새벽 공기는 차갑다. 두터운 외투를 찾아 입고 나선 길이지만, 추위는 서러움처럼 온다. 이상하게 오늘 따라 MP3 플레이어에서는 슬픈 노래들만 나온다. 마음이 허하다. 가을인가, 그래서 그런가.
계절이 추워지는 것은 거스르지 못할 자연의 섭리라고 치자. 그런데 오늘 나의 허전함은 낮아진 기온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외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안이 필요하다. 너무 힘들지? 이런 따뜻함도 좋지만, 울게 해 주라. 이 미칠 것 같은 현실을 견뎌내는 나에게, 그래 고생이 많다는 위로보다도. 어때, 잊고 살았지? 사랑은 이렇게 슬픈 건데, 이렇게 힘든 건데, 울어 볼래?
지난 1년, 지구화된 자본의 위력 앞에 개인의 나약함을 절감했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나 괴로웠다면, 오늘도 내 얄팍한 주머니를 털어가는 탐욕스러운 자본에 무력하다면, 우리 울자. 그리고 다짐하자.
‘많이 먹고, 푹 자고, 제 시간에 일어나, 죽어라 일하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바라본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솔직하게 고민해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보기에, 독자인 내가 보기에도 사랑스러운 그녀인데. 그는 “왜 하필 나니?”라고 그녀에게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네가 다른 남자를 찾는 편이 훨씬 빠를 걸. 더 이상 날 바라보지 마.” 하지만 그녀는 그를 계속 바라본다. 그가 연모하는 또 다른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또 다른 그녀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와 또 다른 그녀와 함께 밥을 먹는다. 그녀는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비치는 강가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 “마야마, 바∼보.”
우미노 지카의 만화 ‘허니와 클로버’는 가벼운 학원 코미디에서 시작해 두 갈래길을 간다. 한 길은 사랑스러운 그녀 야마다와 마야마, 리카, 노미야의 이야기. 다른 한 길은 예술과 재능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모리다, 하구미, 다케모토의 삼각관계. 슬픈 로맨스는 첫 번째 길이다.
야마다와 마야마는 늘 함께 지내던 대학 동창. 야마다는 마야마를 좋아하지만, 마야마는 아르바이트했던 회사의 리카를 좋아한다. 하지만 리카는 자신이 운전한 차를 타고 가다 사고로 죽은 남편 하라다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여자의 그림자만 좇는 모습에 절망하는 야마다를 바라보며 위안의 손을 내민 이가 노미야. 노미야(남)→야마다(여)→마야마(남)→리카(여)→하라다(남) 이런 식으로 이들의 사랑은 한쪽만을 바라본다. 하지만, 결국 사랑에 실패한 이들에게는 손을 내미는 이가 있고, 그(그녀)는 그녀(그)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도 이 만화를 보며 위로받는다.
걸 그룹의 쭉 빠진 허벅지 사진으로 위안받으라고 말하는 매체들 사이에서 가을을 맞아 가슴이 허하다면, 로맨스 만화를 보자.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등장해 나에게 소주를 권하는 유이의 허벅지보단 차라리 내 강퍅한 감정을 건드려 눈물을 터뜨려줄 로맨스 만화가 2009년 가을에 적합하다. 로맨스 만화는 여자들이나 보는 만화라고 생각하겠지만, 남자들에게 적합한 작품도 많다. 앞서 소개한 우미노 지카의 허니와 클로버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발랄한 개그감각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처연한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10권이라는 분량도 적당하다. 액션만화를 선호하던 남자독자들이라면 정서에 대한 꼼꼼한 내레이션이 좀 버거울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건너뛰어도 좋다.
열 권이 부담스럽다면, 한 권짜리 만화도 있다. 고다마 유키의 ‘백조 액추얼리’. 우연히 당신이 구해 준 백조 한 마리가, 집으로 찾아온다. 물론 백조의 모습이 아니라 검은 머리에 하얀 옷을 입은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으로. 가난한 건축학도 후세 요이치와 스스로 백조라 주장하는 순정파 의문의 여인 미와의 러브스토리도 바스라진 내 감정선을 건드린다. 아, 그녀의 하얀 날개옷이, 붉게 물든 뺨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한정훈기자 existe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