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남녀 주인공들이 나오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엇갈리게 되고, 독자는 가슴을 졸이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순정만화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의 전형적인 진부한 표현(클리셰)이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주인공의 사랑 감정에 치우쳐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집중하게 돼 순정만화라고 하면 쉽게 ‘아, 사랑이야기∼’라고 단언을 하기도 한다. 성급한 단언은 금물이다. 하지만 순정만화 역시 그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구축하고 있는 법. 스산한 가을바람이 겨울을 재촉하고 있는 이때에 순정만화가 보여주는 다른 얼굴을 한번 구경해 보자.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한혜연 작가의 ‘애총’이다. 주로 단편집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한혜연이 만화잡지 팝툰에 연재하고 있는 작품으로 사이비종교에 얽힌 이야기를 무속신앙과 결부시켜 긴장감 넘치게 풀어내고 있다. 책 제목인 ‘애총’은 한자로 ‘兒塚’, 즉 ‘아이무덤’이라는 뜻인데 애총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과 그 속에 보이는 숨길 수 없는 욕망 그리고 감추어진 비밀들이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여러 단편으로 내공을 쌓아온 작가는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을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으니, 순정만화 속 스릴러를 맛보고 싶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애총보다 조금 더 유명한 작품으로는 강경옥 작가의 ‘두사람이다’가 있다. 오기환 감독 작품으로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전생을 둘러싼 이야기의 매력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주인공 ‘지나’는 어느 날 자신이 주변의 가까운 사람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시달린다. 이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가문의 저주인 셈이다. 저주가 점차 실현되면서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직접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살인자를 찾아 나서게 된다.
글로 쓰여진 내용으로만 봐서는 스릴러나 공포물의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작품 속에서 뛰어난 연출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는 강경옥 작가의 매력은 자칫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내용에 작가만의 세계관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현실감을 느끼게 만든다. 순정만화 장르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등골이 오싹하게 조여오는 기분을 한껏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스릴러물이나 공포물은 아니지만 현실세계와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이은 작가의 ‘분녀네 선물가게’가 있다. 무당의 피를 이어받은 주인공 ‘분녀’가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 골동품을 팔며,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다. 각각의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인데, 몽달귀신이나 광속에서 숨어 있는 귀신 등 정겨운 귀신들의 이야기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오른다.
더불어 죽부인이나 효자손 등 우리가 익숙한 소재를 이용, 퇴마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으니, 그동안 일본이나 서양적 퇴마이야기에 조금은 질린 사람이라면 우리네 정겨운 귀신들과 한껏 어울려 놀 수 있을 것이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들은 보너스 선물이다. 영화화 판권이 이미 판매됐다고 하니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기대하며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낮은 짧아지고 반면에 밤은 한껏 길어지고 있는 이때 추천한 만화들을 꼭 한 번씩 읽어보길 권한다. 상상하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의 힘, 한국 순정만화의 매력을 스릴러 혹은 호러물 속에서도 속속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백수진 한국만화영상산업진흥원 만화규장각 콘텐츠 기획담당 bride100@par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