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간 50
전자산업50년사편찬위원회 지음, 전자신문사 펴냄.
한국 전자산업 50년의 슬픔과 기쁨이 고스란히 깃들었다. 인물이 흥하고 망한, 기업이 성하고 쇠한 과정이기에 쪽마다 애환이 서렸다.
구인회, 김완희, 오명, 윤종용 등 굵직한 인물은 물론이고 김해수씨처럼 잊지 못할 이름에 눈길이 머문다. 그 이름 하나, 제품 하나에 깃든 애환이 더욱 깊어지는 이유다.
구인회 락희화학 사장은 1958년 10월 금성사를 설립해 김해수 주임에게 첫 라디오 ‘A-501’ 설계를 맡겼고, 이듬해 11월 제품을 내놓았다. 논란이 많지만 그것이 한국 전자산업 50년의 시작이었다.
라디오 ‘A-501’은 한국 전자산업의 씨앗이자 정치·사회적 상징이 됐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부산 연지동 금성사 공장을 찾았을 때, 김해수씨가 시장에서 고전하는 ‘A-501’을 알린 게 도약의 계기였다. 박정희 의장의 ‘(라디오 등) 밀수품 근절에 관한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과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첫 국산 라디오를 살렸고,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국 전자산업을 도약대로 밀어올렸던 것이다.
한국 전자산업은 이후에도 군사정부의 전투적인 산업 진흥책에 힘입어 약진했다. 1966년 2월 해외에서 도입한 기술을 토착화하고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만들고, 1969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을 만들어 중앙행정기관(상공부)이 전자산업 육성 주무부처로 나서는 등 주요 시점마다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 1985년 한국전통신연구원(ETRI)을 만들어 전자교환기·반도체·이동통신기기 등을 개발하고 산업화하는 과정에도 전두환 정부가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도 정부가 기업을 이끌어 산업화하고 시장까지 만들려는 시도(규제·정책)가 이어졌다. 다만, 김대중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와 산업 발전에 힘입어 체급을 불린 기업의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시장 자율’과 ‘공정 경쟁 규제’라는 새싹을 틔웠다. 이제 새로운 50년을 향해 지나간 ‘기적의 시간 50’ 마지막 쪽을 덮을 때다. 3만원.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