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성장은 이제 대한민국의 국가비전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자연보호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MB정부의 야심찬 꿈은 후퇴를 모르는 종교 교리처럼 사회 곳곳에 큰 파장을 미치고 있다. 이쯤에서 한국이 추구하는 녹색성장의 정확한 모델,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녹색도 자세히 보면 종류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인류가 추구할 수 있는 경제성장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캐나다의 지구물리학자 투조 윌슨은 성장의 한계를 다음과 같은 이치로 설명한다.
여기 몸무게 4㎏의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첫돌까지 아기는 젖을 빨면서 몸무게가 약 50% 늘어나 6㎏이 된다. 두 번째 생일에는 또다시 50% 정도가 불어서 9㎏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유년기에 평균적으로 매년 50%씩 몸무게를 늘리면서 무럭무럭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어린이가 이러한 속도로 계속 덩치가 커진다면 문제가 생긴다. 어린이는 여섯 살에 30㎏, 일곱 살에 45㎏, 아홉 살이면 100㎏으로 성장하며 괴물처럼 변해갈 것이다.
모든 고등동물은 뼈와 근육이 중력을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수준에서 성장을 멈춘다. 우리는 스무 살을 넘긴 성인이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한 나라의 경제도 일정한 규모를 넘어선 이후에는 국민의 소비수준을 계속 높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화폐량이 늘어나 명목상 국민소득은 늘어나도 전반적인 삶의 질은 자원 고갈, 환경 오염 등으로 오히려 뒷걸음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국민소득이 5000달러에서 1만달러, 2만달러, 4만달러로 증가할수록 더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믿어왔다. 그렇지만 외환위기 이후 국민소득은 높아져도 사회 양극화로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팍팍해지지 않았는가. 요즘 TV 채널을 도배하는 대출광고는 외형적 경제성장이 소득 이상의 과소비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중산층의 가난을 부추기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좁은 한반도 안에서 가능한 물질적 풍요의 적정선을 이미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MB정부의 녹색성장은 개념자체가 모순이지만 단기적인 산업정책으로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한국이 친환경 산업을 집중 육성하게 되면 각종 환경규제를 빌미로 세계시장에서 당분간은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더 많은 생산과 고용을 창출하면서 자연훼손을 다소 경감시키는 가시적 효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자연보호와 경제성장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계획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경제운영의 지표를 지속적 성장이 아니라 현상유지로 바꿔야 하는 사고의 전환, 결정적 변화의 시기는 반드시 다가온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이 시점을 전후해서 양적성장이 아니라 자원보존에 초점을 맞추는 ‘보존사회(Conserver Society)’의 등장을 예측한다.
소비사회에서 보존사회로의 전환은 우리가 내핍과 부족의 시기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상은 그 반대다. 인류 문명을 지탱시킬 소중한 에너지와 자원, 공유재를 더욱 합리적으로 관리해 후손들의 높은 생활수준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보존사회의 다양한 모델은 녹색깃발을 쳐들고 무조건 뛰어가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MB정부의 녹색성장은 단기적으로 산업경쟁력을 키우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정책이 아니다.
녹색성장은 파산한 소비사회에서 지속가능한 보존사회로 가는 과도기적 단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녹색성장 이후 한국이 추구하는 사회모델을 놓고 정부와 국민의 진지한 토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보존사회 5단계
보존사회는 캐나다 과학위원회가 1970년대 중반에 처음 연구했던 대안적 미래사회의 한 형태다.
무려 30여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돌아봐도 보존사회는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봉착한 구조적 문제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캐다나 과학위원회가 펴낸 보고서는 정부가 경제성장에 투입한 자원량의 비중에 따라 총 5단계의 보존사회 모델을 만들어냈다.
◇보존사회 0단계=‘더 많이 투입해 더 많이 생산하자’는 북한식 경제구호에 따라 생산증대를 위해 더 많은 자원소비를 당연시하는 사회체제다.
대부분의 국가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보존사회 0단계를 한 번씩은 거치게 된다. 농업과 산업에서의 팽창된 생산력을 이용해 모든 방면에서 자신만만한 고도성장을 이뤘던 좋은 시절을 가리킨다. 자원은 사실상 한계가 없고 지구는 인간이 만들어낸 엔트로피와 쓰레기를 끊임없이 흡수해줄 것으로 낙관했다.
상품 생산과 소비에서 끊임없는 성장을 가로막는 어떤 개념에도 거의 관심이 없다. 녹색성장을 추구한다는 한국경제도 실상을 따져보면 0단계 수준에서 벗어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보존사회 1단계=‘덜 사용하면서 더 생산하기’라는 구호가 통하는 사회다. 녹색과 성장을 함께 추구한다.
지금 MB정부가 달성하고자 하는 이상적 사회. 환경과 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면 바로 보존사회 1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사람들은 성장의 한계를 자각하며 조금씩 라이프스타일을 바꿔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근검절약하고 자원을 아끼는 데 동의하지만 또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원한다는 현실론을 가정한다.
현재 소비사회에서 넘쳐나는 과소비와 낭비를 없애도록 고효율의 경제체제를 고안하는 것이다. 보존사회 1단계는 에너지, 자원을 가능한 덜 쓰고 낭비하지 않으면 꾸준한 성장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보존사회 2단계=‘덜 사용하면서 예전과 똑같이 누리기’가 목표인 성숙하고 안정된 사회다.
이미 풍요롭고 높은 수준의 경제적 부를 추구한 상황에서 최대한 자원을 아끼는 절제의 미덕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 보존사회는 경제성장과 부의 축적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다.
어느 시점에서 충분한 양적 성장이 이뤄졌는지 검토하고 이후에는 삶의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는 데 주력하는 사회적 합의를 맺는 것이 도전과제다. 이러한 사회는 자원을 아끼고 효율성을 추구하면서도 굳이 경제성장과 부의 축적을 장려하지 않는 점에서 1단계 보존사회와 차별화된다.
◇보존사회 3단계=‘적게 벌고 적게 쓰자, 뭔가 다른 것을 해보자’는 탈자본주의화를 거쳐 부의 축적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로 진화하는 것이다. 보존사회 3단계는 효율적인 경제성장이나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삶의 가치를 정신적 성숙과 성장에 맞춰 나가는 것이다.
서른 살이 된 성인은 더 이상 체중이 증가하지 않지만 성숙함과 이해력, 지혜와 깨달음에서 계속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보존사회 3단계는 확연히 다른 삶의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현대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사치성 소비재, 산업화, 도시화의 장점을 모두 부정한다.
자연 속에 지어진 공동생활체, 조용한 사찰과 같은 사회 분위기를 상상하면 되겠다. 진정한 삶의 질을 측정하기 위해 GNP가 아닌 행복지수가 도입된다.
◇보존사회 마이너스(-) 1단계=‘있는 대로 쓰고 최대한 즐기자’ 가장 최악의 사회모델로서 탕진사회라고도 불린다.
보존사회 -1단계는 낭비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여긴다. 더 낭비적인 사회가 될수록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 위한 취업기회가 늘어나 완전고용도 달성할 수 있다.
지구환경은 끊임없는 자원의 공급처이며 오로지 현재만이 생각할 가치가 있다. 환경운동이 경제적인 활동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준다면 반드시 거부당한다. 1950∼1960년대 미국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이라는 말이 통했던 사실을 되새겨 보자.
탕진사회는 생산력이 사람들의 구매력을 초과하게 마련이다. 넘치는 상품과 서비스를 처리하기 위해 국민에게 빚(카드·신용대출)을 내서라도 소비하라고 장려한다. 오늘날 미국경제의 암울한 현실은 수십년간 세계 자원을 가장 많이 소비해온 탕진사회의 결말을 보여준다.
`KT경제경영연구소가 하와이 미래학연구소에 의뢰한 보존사회 보고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