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국가기록원이 주최한 ‘선물과 유품으로 만나는 박정희 대통령’ 전시회가 열렸다. 선물·유품·영상 등 4개 세션으로 나눠 열린 전시회에서 유독 눈길을 끈 제품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재에서 직접 사용하던 손때 묵은 책상과 결재용 받침대였다. 청와대 옛 본관 1층 집무실에 있던 것으로 대통령 책상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볼품 없었기 때문이다.
개막식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옆에서 한참 동안 책상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한국 전자산업 대부’로 불리는 김완희 박사(84)다. 미국에 거주하는 김 박사가 전시회에 맞춰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김 박사는 앞서 국가기록원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교환했던 서신 103점을 통째로 기증했다. 40년 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친필 서한에는 당시 전자산업의 생생했던 현장의 목소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 박사는 84세 고령으로 몸이 다소 불편해 보였지만 전자산업 초기 시절을 또렷이 기억했다.
김완희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전자’라는 말 조차 생소하던 당시,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전자 분야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명확한 현실 인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시 정책 입안자들이 산업의 이해도가 조금만 높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전자 강대국으로 성장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김 박사는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 국내에서 전자산업의 싹을 심고 기반을 닦은 전자산업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당시 산업계를 위해 ‘전자신문’을 설립할 정도로 언론과 인연도 각별하다. 오직 사명감으로 전자산업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30년 전 김완희 박사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당시 박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나.
△처음 만났을 때가 눈에 선하다. 몸담고 있던 컬럼비아 대학 총장실에서 나를 불렀다. 총장이 “한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에 대해 오늘 미국에서 리셉션이 있다”며 나를 가라고 했다. 당시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호텔에 갔더니 군복을 입은 사람들 열 대명이 모여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종필 중령 등이었다. 키가 작고 시커먼 사람이 성명을 읽기 시작했는데 성명서를 쥔 손이 ‘바르르’ 떠는 게 보였다. 긴장감이 나까지 전달됐다. 그분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전자산업과 첫 인연은.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김현철 워싱턴 대사가 “김박사, 한국으로 좀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1967년 8월께였다. 한국에서 대통령 초청장이 왔다고 했다.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만난 박정희 전 대통령 인상은 시골 나무꾼 같았다. 처음 봤을 때는 계급장도 달고 있지 않았다. 작고 시커먼 사람이 눈빛에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박 전 대통령은 나를 만나자마자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못 먹고 사는데 나라를 일으켜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전자 산업을 지목했다. 전자 분야가 생소했을 텐데 통찰력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 ‘전자’라는 말도 이해 못했을 것 같은데.
△정부 부처 관료의 전자산업 이해도를 높이는 게 급선무였다. 청와대에서 전자산업 정의에서 선진 기술, 제품 동향, 육성책 등 엄청난 양의 브리핑을 진행했다. 그 자리에는 박 대통령도 참석했다. 정말 박 대통령은 2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브리핑을 경청했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브리핑을 다 듣고 대통령은 즉석에서 전자산업 육성책에 관련한 보고서를 주문했다. 그 다음에 곧바로 현장으로 뛰었다. 일주일 가량 둘러본 현장은 한 마디로 한숨만 나왔다. 시골 벌판에 벽돌로 대충 만든 공장에서 일제 라디오를 카피한 제품을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쓸만한 전자 제품이 나올 수 있을 지 의아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68년 8월 김 박사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 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내놓았다)
-박 대통령이 전자 산업에 그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나.
△보고가 끝나고 박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때 밥에 손수 깻잎을 얹어 줄 정도로 자상했다. 식사가 끝나자 서재로 안내했다. 그리고 책상에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올려 놨다. 박 대통령은 라디오를 가리키며 “손가방 하나만 한 게 몇만 달러에 달한다. 기껏 지금 수출 품목은 섬유 등 면직물” 이라고 한탄했다. 이어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 데 도와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굳건한 의지를 차마 꺾을 수 없었다. 나중에 육영수 여사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박근혜씨가 본인이 원하던 가사과를 포기하고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후 박근혜 전 대표는 퍼스트레이디로 일할 때 국내 전자공업 발전에 정말 큰 기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박 대통령이 전자산업을 일으킨 건 국가적인 일이었을 뿐 아니라 나와 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약속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자산업을 육성하는 업무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데.
△박 전 대통령은 소탈했다. 하루는 연락도 없이 의전실장이 와서 “박 대통령님께서 기다리신다”고 했다. 어디에 계시냐고 했더니 에어컨도 켜 있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아껴야 한다며 바지 밑단도 헤질 때까지 입으시고 넥타이도 오래 매서 구김이 져 있었다. “아, 이렇게까지 나라를 위해 고생하시는데 우리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업무 추진력도 대단했다. 주변에 각료들이 “이건 법, 저건 관행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타당한 건 일사천리로 밀어붙이셨다. 그래서 점점 더 대통령과 직접 이야기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다. 각료들은 이해 못하는 전자공업 분야를 박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했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은 어떤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면 바로 벨을 눌러 시정을 명했다. 70년대 당시 TV 특소세가 35%나 됐는데 대통령께 인하 필요성에 대해 피력했더니 바로 15%로 내렸다. 각료들이 반대했지만 전자산업 육성을 위한 일이라며 밀어붙였다. 당시 해외에 있던 근로자가 한국 제품을 사면 관세를 안 물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쉬움은 없나.
△당시 정계와 산업계를 이끌었던 정책 책임자들이 조금 더 전자 분야에 대해 알았더라면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바로 바로 추진해야 할 정책들이 산더미 같았는데 정부 부처의 저항, 이해 관계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웠다. 이 분야가 전문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너무 몰랐다. 위정자들이 더 알았다면 더 발전했을 텐데.
-기억나는 기업인은.
△대우 김우중 회장을 일본 가는 비행기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왜 부품을 중소기업에 생산하도록 시키느냐, 그러니 품질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심각하게 따졌다. 나는 학자고 그분은 기업가라 현장에 대해서는 잘 알았던 것 같다. 이전 D전자의 경우 전자기판을 만드는 곳인데 기술이 안 좋았다. 내가 3년 동안 수입품을 제한하겠으니 개발자를 데리고 와서 만들어보라고 했다. 수입품 조치를 취할 때마다 대기업 반발이 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김우중 회장 말이 맞았다. 부품도 반도체처럼 대기업 주도로 했어야 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도 기억한다. 이 회장이 전자산업에 관심이 많을 때 주로 정재은(신세계 명예회장)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 당시 정재은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내 수학생이었다.
-전자신문(당시 전자시보)은 어떤 계기로 창간했는지.
△산업 부흥을 위해서는 언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자시보(전자신문 전신)’를 만든다고 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다. 그때 언론 통폐합이 한창 진행될 때였는데 허문도 장관이 통신부·체신부·상공부 추천을 받아줬다. 가능성이 있다고 한번 해보라고 했다. 6개월 준비 작업을 거쳐 초대 발행인으로 1호를 발간했다.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기업체에 요청을 하니 당시 삼성전자가 고작 30부를 구매해준 게 기억이 남는다.
-강산이 세 번 변했는데, 대단한 기억력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다. 엄청난 분량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일기를 다시 뒤척이며 읽는다. 벌써 세 번이나 읽어 봤다.
-전자산업 50년이다. 조언을 한다면.
△지금까지 잘해 왔다. 지금은 새로운 정책을 발굴하기 보다는 응용력을 높여야 한다. 기술 흐름이 그만큼 빠르다. 정책 입안하고 산업 육성하고 이전처럼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면 뒤처진다. 그만큼 속도가 빠르다. 정부 역할도 크다. 정책을 입안하는 결정권자가 IT 가치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 더 조언한다면 기계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기계(로봇)는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 교육도 로봇이 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교육하는 식이다. 불과 몇 년 내에 그런 시대가 온다. 더 이상 인간이 내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허정윤 기자
◆김완희 박사는 누구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경기고,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미 유타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땄다. 박사 논문으로 ‘브루니 정리’의 예외를 발견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유타대 졸업 후 일리노이 대학 연구원, 미국IBM 책임연구원을 거쳐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컬럼비아 대학 전자공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김 박사 덕분에 컬럼비아 대학은 전자회로 분야 ‘톱5’에 등극했다.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1968년에 귀국해 79년까지 대통령 특별 자문, 상공부체신부와 과기처장관 고문을 지내며 전자산업 틀을 마련했다. 이후 컬럼비아대 종신교수직을 내놓았으며 전자공업진흥회 상근 회장, 전자공업협동조합 상근 이사장을 1984년 전자 분야의 독보적인 언론인 전자시보을 창간했으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정보기술·컨설팅 업체를 설립하고 지금은 IT전문 과정을 교육하는 ITU(International Technological University) 고문을 맡고 있다.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했다"…회고록서 밝혀
올해는 ‘대한민국’ 전자산업에서 잊을 수 없는 해다. 먼저 전자산업이 태동한 지 50년을 맞는다. 지금부터 50년 전인 1959년 LG전자가 자력으로 첫 국산 라디오를 개발했다. 그때부터 전자는 국가 성장 동력으로, 기간 산업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 결과 1960년대 초반 국민소득 60달러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을 국민소득 2만달러, 세계 12위 경제 대국으로 이끌었다. 게다가 전자산업 기틀을 닦은 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 30주년을 맞는다. 박 대통령 평가는 지금도 엇갈리지만 전자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전자 대국을 위한 초석을 닦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완희 박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60∼70년대 정부 부처나 경제계에서도 거의 관심이 없었던 전자 공업에 일찍 눈을 떴으며 거의 매일 김 박사와 독대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지금도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전자 공업 발전 수준을 지금보다 5년 이상 앞당겼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가 전자산업 태동 50년을 맞아 집대성한 ‘기적의 시간 50’에는 초기 전자산업 시절에서 지금까지 국내 전자 산업 발자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박 대통령 당시 숨가빴던 정책 결정의 막후 이야기와 전자산업을 위해 몸바쳤던 수많은 전자 영웅들의 숨은 이야기를 현장감 있게 담았다.
전자산업 육성의 마스터플랜을 짰던 김완희 박사는 이 책에서 “백지 상태에서 외부 도움없이 자력으로 이뤄냈다는 게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라며 “그만큼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