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 삼성증권 고문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금융산업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은 금융업에 몸담고 있지 않아도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익히 알 수 있다. 필자는 지난 1년여 동안 홍콩의 시장 변화를 보며 이번 금융위기가 금융시장의 게임 룰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IT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이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증권시장은 1980년대 말 리테일(소매) 영업 시장을 크게 바꾸어 놓은 IT 기술이 있다. 바로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그것이다. HTS는 전통적 브로커에만 의존하던 주식매매 패턴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이 기술의 출현으로 인해 전통적 브로커들의 존재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또 HTS 기술만으로 차별화를 꾀해 지점을 갖지 않고 운영하는 디스카운트 증권회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글로벌 증권사들도 전통적 브로커 모델과 IT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모델 사이에서 고민하며 한동안 혼돈스러운 시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지금까지 리테일 시장에만 국한돼 왔다. 증권사들의 법인 시장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법인 거래는 세일즈맨들에 의해 ‘관계(Relationship)’를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였고 지금도 대부분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사실 국내 증권사들은 리테일 위주의 비즈니스 모델이라 법인 영업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 글로벌 증권사들의 트레이딩은 법인 고객을 주로 하는 프라임 브로커리지가 주 모델이기 때문에, 관련 법인 트레이딩의 기술 변화가 증권사의 수익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까지의 법인 트레이딩 기술은 리테일 시장에서 일어난 HTS 같은 모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왔지만 최근 들어 그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기술적 변화는 크게 세 가지의 트렌드를 보인다.
첫째는 대체 거래소의 출현이다. 각 나라의 정부가 주도하던 주식 거래소가 민영화하면서 경쟁 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이에 따라 기술적 우월함을 바탕으로 한 대체 거래소가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훨씬 빠른 거래 체결 시스템을 바탕으로 저렴한 수수료까지 제공하며 기존 거래소의 비즈니스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차이-엑스(Chi-X)’ 같은 회사는 비즈니스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유로 증권시장의 20%를 넘는 시장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회사의 규모와 활동 시간을 볼 때 그 속도와 시장 확장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국이나 유럽 같은 대형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 회사는 일본, 홍콩, 싱가포르를 비롯 아시아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한국 시장 등에 진출하면 근본적으로 법인 트레이딩의 게임이 바뀔 수밖에 없다. 리테일 시장의 HTS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
둘째는 알고리즘 트레이딩의 활성화다. 국내에서는 이제 막 시작된 일종의 시스템 트레이딩 방법으로, 역시 법인 고객들이 사용하는 새로운 트레이딩 기법이다. 이는 대량 주문을 가정해 시장의 유동성, 시간차 등을 수학적 모델을 사용해 자동으로 주문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거래를 만들어내는 IT 기반의 거래 방식이다. 국내 몇몇 증권사들이 테스트하고 있고 외국 증권사들은 이미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미국 시장의 경우 법인 트레이딩의 70% 정도가 이러한 알고리즘 트레이딩 방식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방식은 전통적 세일즈맨과 트레이더들의 역할을 줄이게 된다. 또 대형 글로벌 증권사의 경우 10여 명 내외의 작은 조직으로 알고리즘 팀을 운영해 상당한 소득을 올리며 기존의 세일즈-트레이더 조직을 위협하고 있다.
셋째는 다크 풀, 혹은 크로스 트레이딩이라고 부르는 트레이딩 방식이 뜨고 있다. 이것은 국내에서는 활성화하지 않았으나 외국 시장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계속 진화하고 있는 일종의 ‘제3의 거래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트레이딩 방식을 이용하는 회사들은 그들만의 특화된 트레이딩 솔루션과 멤버십을 기반으로 법인 고객들에게 대량의 거래를 빠르고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 세 가지 트렌드가 이번 경제 위기를 겪으며 더욱 활성화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시사점이다. 시장의 변화는 게임 플레이어들의 전략과 생각을 바꾸고 있으며 더 빠르고 더 저렴하게 거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큰 변화에서 제외되어 있던 법인 시장의 거래가 전자 거래화하고, 독점적 거래소가 아닌 다양한 경쟁적 거래소 모델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 글로벌 증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얼마나 IT에 의존하는 모델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 위기가 비즈니스를 변화시키고 그 한가운데 IT가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IT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함과 동시에 미래를 만들어 간다는 큰 책임감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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