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자
△사회=민경찬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과학기술 분야 자문위원(연세대 수학과 교수)
△박항식 교육과학기술부 기초연구정책관(국장)
△반하버벡 벨기에 핫셀대 교수
△피터 존슨 호주 CRC 의장
△현재호 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 대표
정부가 지난 10년간 ‘과학기술 대국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내걸고 추진한 ‘21세기 프런티어 사업’이 BT•NT•ET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전략 기술 개발과 상용화라는 결실을 낳고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21세기 프런티어 사업이 선진국의 앞선 기술을 ‘따라잡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내년부터 본격화하는 ‘글로벌 프런티어 사업’은 우리나라가 ‘주도할 수 있는’ 영역 개척에 무게 중심을 뒀다. 전자신문은 10년 사업의 결실을 총망라한 ‘2009 프런티어 연구성과대전’에 즈음해 국내외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최근 과학기술계의 이슈로 떠오른 대형 중장기 사업 추진의 방향성을 모색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현재 호주 민간과 공공 연구기관의 R&D 협력을 위한 호주 최대 R&D프로그램인 CRC의 의장을 맡고 있는 피터 존슨과 유럽연합(EU)내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 최고 전문가인 반하버벡 벨기에 핫셀대 교수 등이 특별 참석해 글로벌 협업과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성공 조건을 제시했다.
사회=교육과학기술부가 추진해온 21세기 프런티어 사업은 상당한 투자만큼이나 성과도 많았던 사업이다. 오늘 좌담회에서는 크게 국가 주도 대형 중장기 사업의 철학 및 방향성과 중장기 사업 효율성(ROI) 극대화 방안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논했으면 한다. 먼저 대형 중장기 연구개발사업을 국가가 주도할 때 어느 정도의 연구 규모와 연구 기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인지 의견을 듣고 싶다. 또 정부가 이러한 대형 사업을 추진해야만 하는 당위성은 무엇일까.
박항식 국장=최근 대형 연구 사업은 연구 규모가 점점 커지고 학문간 융합화가 이루어지면서 어쩔수없이 대다수 연구자가 공동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추세가 됐다. 우리 정부는 지난 1992년에 G7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대규모 사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아직 연구개발 단계에서는 선진국을 따라가는 입장이지만 연구 성과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정량적으로 정의하면 연구 과제에 따라 다르지만 연간 50억원, 9년 이상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사회=해외는 어떠한가. 호주의 대형 중장기 연구개발사업의 성과와 성공조건이 궁금하다.
피터 존슨 의장=호주 역시 90년대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과 역사적인 조건이 비슷하다. (대형 연구개발사업의 성공조건은) 국가의 크기나 부의 격차에 따라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 R&D 비용과 문화적 요소가 다르고 세금 제도 등 여건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로 소규모 기업이 연구개발 과제를 추진하기 때문에 정부역할이 중요해진다. 시작 단계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는 작은 기업들은 규모나 재정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유럽의 경우 대형 중장기 연구개발사업의 성과로는 무엇이 있나.
반하버벡 교수=EU가 큰 규모의 사업을 주도하고 국가별 작은 정부가 협조해서 사업을 꾸려나가는 형태다. 지난 90년대부터 다수 기업과 학교가 참여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경험했다. 그런데 역시 비용이 문제다. R&D 사업은 규모가 커질 수록 국가간 경계를 넘어설 수록 비용이 불어난다. 이 때 EU라는 대규모 조직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최근에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활용해 비용을 줄이고 있다. EU의 성공 사례 중 IMEC 프로젝트의 경우 자금의 15%를 정부가 대고 나머지 85%는 민간이 부담했다. 나노전자 부문에서 인텔•IBM의 주도 아래 민간의 대대적인 비용 투자가 단행됐다. 개발된 기술도 어느 한 기업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 기업이나 단체들이 라이선싱 부문에서도 협업하는 모델을 채택했다. 비용뿐만 아니라 세계화도 최근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 유럽을 따로 나눠 생각하지 않고 ‘지식 세계화’를 모토로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때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특정 R&D 프로그램을 가동한다면 한국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사업이 돼선 안된다.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만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로 글로벌 R&D로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사회=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동반상승이 필요한 때다. 기업의 관점에서는 어떠한가.
현재호 대표=국가 연구개발 사업을 추진할 때 대형 중장기 과제가 있고 작은 규모로 추진하면서 개인 창의성을 개발하는 접근 방식이 있다. 대형 프로그램의 가장 큰 역할은 미래 트렌트를 먼저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만 하는 변화와 기술 테마에 대해 신호(시그널링)를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그널링 자체가 민간의 투자를 촉진시킨다. 21세기 프런티어 사업은 국가가 주도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시그널을 줬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 만약 21세기 프런티어 사업 예산을 대형 프로그램이 아닌 개인 연구비 형태로 나눠줬다면 과연 성과가 어떠했을지 미지수다. 아마 시그널링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사회=정부는 R&D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항상 효율성 문제가 대두된다. 대형 사업 추진 과정에서 논문•특허•기술이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산성을 어떻게 극대화할 수 있을지 의견을 듣고 싶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협업이 중요하다는 유럽의 ROI 극대화 방안은.
반하버벡 교수=유럽은 사실 ROI 측면에서는 성과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했지만 혁신 사이클을 충분히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은 연구가 새로운 사업 창출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벤처캐피털, 커뮤니케이션, 정부 정책의 응용, 교육제도 등 모든 것을 고려해 더 큰 경제제도, 기업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 기술적인 면에 너무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술이 부의 창출의 전부는 아니다. 애플만 보더라도 아이폰이나 아이팟은 전혀 새 기술이 아니라 존재하는 기술을 사업화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기술이 아니라 갖고 있는 생각을 새 사업으로 연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 국장=정부 ROI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용 절감보다 이익 극대화다. 우리나라는 연구개발 예산을 계속 늘리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에 대해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연구기획이다. 현재 과학적 기법을 활용한 전략 기술 지도를 개발하는 중이다. 평가 시스템도 대대적으로 수정하고 있다. 논문보다는 특허를 더 중요하게 볼 것이다. 성과가 부진한 곳 10% 정도는 탈락시켜 경쟁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우수 연구자에게 기회를 더 부여할 수 있도록 양적 성과보다는 질적 성과를 더 많이 본다. 또 추적 평가를 통해 새로운 과제에 피드백을 주는데 신경을 쓴다. 기획 단계에서 오픈 이노베이션 시스템을 적용해 국내에 국한하지 않고 국제적인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외국인을 영입하기 위해 규제도 많이 완화하는 중이다.
사회=호주는 대형 사업 ROI를 어떻게 정의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존슨 의장=벨기에의 상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호주도 비슷한 상황이다. 과학 기술 성과를 사업으로 이전하는 단계인데 이것이 매우 큰 이슈다. 전통적으로는 이 분야가 생산성을 제고하기 쉽지 않은 분야였다. 호주의 경우도 현재는 매우 초기 단계다. 내부적으로도 진행하지만 외부 기업과의 사업 협력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사회=대형 연구사업은 과제 규모가 너무 커서 신진 연구 인력의 진입이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창의성과 독창성에 제약 가능성이 존재한다. ROI 강조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할 만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 대표=대형 중장기 연구개발 사업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 소규모 프로젝트에 비해 여러명이 협동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단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목표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런데 기존의 대형 중장기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생산성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부터가 안 돼 있다. 연구개발 정책이나 기술 경영 분야에서 대형 중장기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성과를 어떻게 측정할 것이냐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대형 중장기 사업의 취약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개인 창의성을 희생시킬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 창의성의 조합을 통해 대형 중장기 사업을 기획하고 협업을 통해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는 운영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에 따라 개개인의 능력을 끌어내 시너지를 창출하는 코디네이터의 양성이 핵심 과제다.
존슨 의장=맞다. ‘측정’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지금까지 연구과제에 대한 평가를 많이 했지만 수치화하기는 어렵다. 페니실린 발견과 관련해 수익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측정하느냐가 한 예다. 각각의 요소들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측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반하버벡 교수=투자와 투자 효과를 어느 하나의 공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 5년 이후에는 알 수 있다. 가시적인 성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수치를 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회=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이 기술혁신 전략으로 일반화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대형 중장기 프로젝트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반하버벡 교수 =오픈 이노베이션은 비용 절감과 생산성 극대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오픈 이노베이션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우수 인력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의 중요성도 더불어 커졌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기업은 연구와 사업개발의 중간 지점에 바로 진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식재산권을 논할 때도 오픈 이노베이션은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지식을 어떻게 보호하느냐에만 관심을 집중했다면 이제는 이를 어떻게 널리 퍼뜨리는 지에 집중해야 할 시기다. 더 이상 기업들이 단순히 기술을 보유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대학•기업간 에코시스템도 구축할 수 있다.
사회=참석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부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는 것 같다.
현 대표=우리나라는 전세계에 흩어진 연구 자원이나 해외 기업의 정보,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국제협력에 힘을 쏟아야 한다. 국제협력은 개인 단위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중장기 프로젝트는 국제협력을 추진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장기 프로젝트를 성공하려면 우리 시스템을 공개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해졌다.
박 국장=호주의 사례처럼 그동안 오픈 이노베이션을 이론을 통해 많이 접하고 기업과는 많은 의견을 공유했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논의가 미비했다. 대형 연구 사업에서 일부 원천 기술에 초점을 맞춰 산학연 협동연구나 국제협력을 추진해왔다. 앞으로 정부가 대형 연구개발 사업을 추진할 때 공공의 역할에 좀더 신경쓰겠다. 특히 사업 추진시 결국 대두되는 것이 지재권 문제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는 최근 서울법과전문대학원에 IP 전공 과정이 특별히 개설됐다. 아직은 15명 정원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국제 흐름에 발맞춰 간다는 것이 매우 큰 의미다. 이것을 잘 꾸리면 해외 파트너와의 사업도 매우 유연하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
사회=우리 정부는 21세기 프런티어 사업에 이어 글로벌 프런티어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새로운 중장기 대형 연구개발사업이 성공하기 위한 제언을 부탁한다.
박 국장=우선 글로벌프런티어 사업을 소개하고 싶다. 21세기 프런티어 사업은 외국을 따라잡는 R&D 사업이어서 국내 연구자들끼리 다소 폐쇄적으로 진행했다. 사람의 융합은 있었지만 기술간 융합은 별로 없었다. 이같은 개념을 바꾸고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것이 글로벌 프런티어 사업이다. 글로벌•그룹•그라운드브레이킹•그린 등 네 분야에 걸쳐 26개 과제를 내년부터 본격 추진한다. 사업을 대형화하되 오픈 이노베이션을 도입한 국제화와 기술 컨버전스를 적극 결합할 방침이다.
반하버벡 교수=결국 인력 관리와 운영이 중요하다. 돈도 중요하지만 인력 운영에 좀더 집중하면 예상치 못한 기술 성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적인 한국의 문화에서 우수 인재의 능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 같다. 창의적인 인재가 돼야 한다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환경,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현 대표=글로벌프런티어 사업도 15%의 예산을 인력 분야에 할당하기로 했다. 대형 사업에서 중요한 것은 열린 환경에서 연구개발 기획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 의사결정 과정에서 정치적인 면을 어떻게 철저히 배제할 것이냐도 굉장히 중요하다.
박 국장=굉장히 좋은 의견들이다. 글로벌 프런티어 사업에서도 기획 단계에서의 오픈 시스템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과제는 충분한 협의를 통해 결정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업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영입하는 것인데, 꼭 국내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도 파스퇴르와 같은 해외 우수기관이 많이 들어와 있다. 이들과도 충분히 협력할 생각이다.
사회=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혁신적 문화를 더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재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정부의 노력 속에서 글로벌 프런티어 사업은 우리 과학기술 역량이 전세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정리=김유경 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