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맞춤옷 시대의 재림](https://img.etnews.com/photonews/0911/091104061030_978106828_b.jpg)
백화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여자가 이 가게, 저 가게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옷을 고르면 남자는 불편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따라간다.
여자는 수많은 기성복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더 최신 유행과 자기 스타일에 맞는 아이템을 찾으려 노력을 아끼지 않지만 아무리 봐도 ‘그게 다 그거’인 남자는 ‘아무거나 사고 빨리 가자’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온다. 이런 일이 오죽이나 많으면 ‘남녀탐구생활’에서 ‘백화점은 백번 돌아야 해서 백화점’이라는 명언을 남겼을까.
원인은 기성복이다. 44, 55, 66과 같은 몇 개 표준(44가 표준이라는 것에 절대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데도) 크기에 맞춰 대량생산되기 때문에 그중에서 나에게 딱 맞는 옷을 골라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필요할 때 곧바로 사서 입을 수 있고, 맞춤옷, 주문복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기성복이기 때문에 감수해야만 하는 불편함이다.
가까운 미래엔 이런 불편함을 겪을 필요가 없어진다. 맞춤옷을 압도했던 기성복이 가고 다시 맞춤옷의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가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 고급 기성복)’의 시대라면 미래는 ‘네오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고급 주문복)’가 주도하게 된다.
◇나만의 오트 쿠튀르=지난달 신세계백화점은 본점에서 3차원 의류 맞춤 서비스인 ‘버추얼 커스텀 메이드(virtual custom made)’를 시작했다.
매장에 설치된 3D 스캐너로 자신의 신체 치수를 잰 고객이 옷 크기와 깃의 모양, 소매 길이와 단추, 원단 종류 등 총 10가지 세부 디자인을 모니터에서 고르고 아바타에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혀보고 나서 구매를 결정할 수 있다.
한 번 측정된 신체 치수는 암호화돼 자신의 전용 전자태그(RFID) 칩에 담겨져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오프라인 매장 어디서나 다시 이용할 수 있다. 백화점 측은 우선 남성 셔츠에 한해 시범적으로 운영한 뒤 고객 반응이 좋으면 상품군을 늘려 상시 운영할 계획이다.
지금은 매장에서만 이용할 수 있지만 보편화, 확산되면 집에서 편하게 내 몸에 맞는 옷을 내 스타일대로 맞춰 주문할 수 있다. 소재, 디자인이 고급화, 다양화되면 디지털을 입힌 개인 의상실, 나만의 오트 쿠튀르가 된다.
◇맞춤옷, 대량으로 재탄생=원래 옷은 모두 이런 주문복이었다. 옷을 대량으로 빠르게 만들 기술이 없었던 때라 일일이 잰 고객 치수에 맞게 하나하나 손으로 만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주문복은 1850년대 이후 약 100년간 절정에 달한다. 1858년 프랑스 디자이너 워스가 파리 개인 의상실에서 직접 디자인한 옷을 여점원에게 입혀 왕족, 귀족 여성에게 선보이고 이들의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든 게 오트 쿠튀르의 시작이다. 하지만 기성복은 1800년대 이후 서서히 영역을 넓혀갔고 세계 대전 이후부터는 맞춤옷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과 세계대전 시기 유니폼 수요, 세계대전 이후 경제공황 등과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기성복이 크게 성장해 의류업계의 주류가 됐다.
이후에는 급변하는 정세에 따라 파리 일류 디자이너들이 상류사회 취향에 맞게 디자인한 옷과 그것을 선보이는 패션쇼가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프레타 포르테다. 기성복 시대는 지금까지도 지속된다.
하지만 발달된 디지털 기술은 맞춤옷이 다시 영역을 확장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3D, 스캐닝, 디자인, 아바타, 통신, 데이터 처리 기술이 기존에 맞춤옷을 만들 때 들어간 인력·비용·시간을 대체해 준다. 저비용이라는 장점을 흡수한 맞춤복이 태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맞춤복은 이전과는 다른 ‘대량맞춤, 맞춤양산(mass customization)’ 의복이다. 품종을 다양화하면서 대량화함으로써 하나의 품종을 많이 생산하지는 않더라도 전체 생산량은 대량생산체제와 맞먹는 수준을 유지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다. 원가를 늘리지 않고도 다양성과 고객을 확대하는 셈이다. 최신 기술로 되살린 장인이 저렴하게 제작한 의복, 그것이 바로 미래의 맞춤옷, ‘네오 오트 쿠튀르’다.
◇의류산업 지형에 변화는 필수적=미래 맞춤옷이 확산되면 기존 의류 생산과 판매 시스템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온다. 기존의 생산 방식은 대량 생산 위주의 생산자 중심이다. 생산자가 만들고 소비자가 맘에 드는 것을 고른다. 하지만 맞춤양산은 선주문, 후생산이 기본이다. 이런 방식은 기본적으로 재고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혁신적인 주문, 생산 방식의 도입과 확산은 대량 기성복 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존 의류업계의 지형 자체를 뒤흔들 가능성이 높다.
산업적 효과 역시 크다. 전통산업 영역으로 분류되는 의류와 IT를 결합하는 새 융합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기존 의류산업에서 차지하는 파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박창규 건국대 아이패션 의류기술센터장은 “기존 의류산업의 10∼20%만 대량맞춤옷이 차지한다고 가정해도 수백조원 규모의 시장을 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린’ 효과는 덤이다. 재고가 없는 생산 방식은 옷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현저하게 줄인다. 업계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옷을 생산, 유통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한 벌당 평균 8㎏ 정도로 추산된다. 재고감소, 이산화탄소 저감 등으로 인한 비용절감 효과는 다시 대량 맞춤옷의 가격인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 기반과 기술 보유=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이 분야 기술개발이 빠른 편이다.
건국대를 중심으로 서울시, 유한킴벌리·FnC코오롱·원풍물산·신세계 I&C 등 의류패션·업체와 SK C&C·삼성전자·SK텔레콤 등의 IT업체, 서울대·KAIST·한국생산기술연구원·한국봉제기술연구소 등 연구기관은 지난 2006년부터 ‘아이패션 의류기술지원센터’ 구축사업을 진행했다. 세계 최초로 의류생산시스템을 미래 환경에 맞게 IT를 활용한 다품종 소량생산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기술을 개발해 실제로 적용하는 프로젝트다. 2011년까지 총 73억원 규모로 진행되는 이 사업에 지식경제부도 50억원을 지원한다.
성과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 센터에서 개발한 맞춤형 티셔츠·장갑 제작 기술은 이미 공군 조종 장갑과 마사회 경마용 장갑 그리고 골프 장갑에 적용되고 있다. 개인의 손을 스캐닝해 자동으로 50여개의 치수를 정밀 계측한 후 개별 패턴을 생성하고 천연 양피를 사용해 개별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신세계백화점 사례도 아이패션의 작품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를 위한 기반도 탄탄하다. 동대문 등지에 산재한 엄청난 수의 옷가게는 그야말로 일대일 맞춤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박창규 센터장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가지지 못한 환경으로 우리나라는 대량맞춤 의복으로 전 세계를 의류시장을 넘볼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고 단언한다.
◇향후 과제는=물론 과제도 남았다. 기술개발도 보완해야 한다. 현재는 ‘스타일 맞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사이즈 맞춤’은 부족하다. 같은 디자인의 옷이라도 치수별로 옷본(패턴)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처리하는 기술을 더 개발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기업의 투자 의지다.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한 대량맞춤 의복 상용화 시도가 세계 처음이다 보니 기업이 아직 확고한 투자 의지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수익에 대한 정량적인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감한 투자로 시장을 선점하지 못하면 우리나라가 개발한 아이디어를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이 활용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
박창규 교수는 “개발한 기술을 활용하지 않으면 SF 영화 잘 만든 것밖에 되지 못한다”며 “과단성 있는 기업은 IT, 섬유강국인 우리나라가 개발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의류산업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순욱기자 choisw@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