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의 역사 - 전화로 읽는 한국 문화사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했다’는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1897년 고종과 정부 부처, 평양, 인천을 연결한 전화 12대를 쓰는 예절이 그랬다고 한다. 관복·관모·관대로 정장을 한 뒤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한 뒤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수화기에 귀와 입을 댔다는 것. 왜 네 번이나 큰절을 했는지는 의문이라니, 실소를 자아낸다.
또 전화를 부를 때 ‘텔레폰’을 음역해서 ‘덕률풍(德律風)’이라거나 전어기(傳語機), 다리풍, 어화통, 전어풍이라고도 했다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격세지감이되 왕실을 사칭해 금붙이 170원어치를 주문해 가로채거나 남의 도장을 훔쳐 전화명의 25개를 팔아 7000원을 사취하는 일이 있었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전화를 이용한 사기는 오십보 백보다.
지칠 줄 모르는 필력을 선보이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가 이번에는 전화와 전화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정리했다. 1896년 한국에 전화가 들어온 뒤 113년 동안 일어난 파란만장한 전화 문화사를 펼친 것이다. 그의 꼼꼼함을 그대로 엿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료와 기사가 담겼다.
강 교수는 2000년대의 전화를 ‘신흥종교’로 풀어냈다. 처음에는 소통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지만, 곧 중독 현상이 나타나 본말이 전도돼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휴대폰이 울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못해 유배로 여기고, 한국에서 시민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휴대폰 번호를 꼭 부여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라고 소개했다. 휴대폰이 ‘내가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판타지를 공급하는 나의 주인’이자 ‘나의 존재증명을 위해 유일신으로 모시는 신흥종교’라는 것이다.
왜 휴대폰은 종교가 됐을까. 마릴린 먼로가 세상을 등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화기를 놓지 않았듯 인간의 고독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가 전화에 맺혔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트레스 해소? 그런데 당신은 당신 휴대폰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1만4000원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