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가족물이라고 하면, 대체로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작품인데 어른도 그럭저럭 즐길 만한 것을 칭하곤 한다. 그렇지 않고 애초부터 어른을 겨냥하는 소수는 지나간 과거의 향수, 즉 어른 속에 있는 옛날 한때의 어린이를 노리는 식이 많다. 물론 후자는 현재의 어린이들이 그다지 재미있어 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명백하게 현대 성인물인데 어린이들도 진심으로 즐기고, 그것도 서로 완전히 다른 요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건과 소동을 보면서 박장대소도 감동도 할 수 있는 극소수의 작품이 있다. 그런 작품들은 평론가들이 따로 의미부여를 해줄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의 작품을 넘어 일종의 일상 풍경이 된다.
‘크레용신짱(우스이 요시토/학산문화사/48권 발매 중)’은 1990년대 중반 즈음 한국에 처음에는 ‘짱구는 못 말려’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대형 히트로 자리매김한 뒤 국내 유명 중견작가가 국내 주류 소년만화잡지에 노골적인 표절작을 연재했는데, 그 후 그 출판사에서 바로 정식 라이선스를 맺고 출간한 바 있다.
‘도라에몽’을 ‘동짜몽’으로 성공적으로 번안했듯, 한국 가족이라는 바뀐 맥락과 짱구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출간이 중단됐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라이선스를 새로 얻어 이번에는 번안하지 않은 버전으로 다시 나온 것이 바로 크레용신짱이다.
작품 줄거리는 이미 널리 알려졌듯, 신노스케(짱구)라는 꼬마와 그 가족이 벌이는 일상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가끔씩 환상 모험활극이 특별편으로 추가돼 있다. 작품의 핵심 매력은 신노스케라는 개구쟁이의 엉뚱함인데, 자각 없는 성적 호기심, 끝없는 낙천성, 어린이의 범주마저 쉽게 뛰어넘을 듯한 단순한 사고방식, 크고 작은 소동을 불러일으키는 활기찬 성격 등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행동의 모습과 순진한 실상 사이에서 나오는 성적 개그나 풍부한 슬랩스틱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도 높은 개그만화를 이룬다.
이 작품이 한 꼬마의 좌충우돌 소동에 그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신노스케가 속한 가족, 그 가족이 속한 동네가 지니는 소시민적 현실감이다. 물론 다큐멘터리식 리얼리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디테일이다. 현대 일본의(물론 현대 한국의 모습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소시민 가족 문화, 동네 단위의 이웃 문화가 구석구석 배어 있다. 현대 표준 가족 속에 말썽 많은 주인공을 배치해서 일상성과 파격의 재미를 같이 추구하다가 보편적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미국의 ‘심슨 가족’에 비견할 만하다.
크레용신짱은 본래 성인용이었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국에서도 성인용 잡지로 데뷔했고, 초반에 선보인 개그 코드 역시 어린이의 행동 때문에 난감한 성적 상황을 만드는 방식이 자주 사용됐다. 하지만 연재가 계속될수록 등장인물 가족들의 캐릭터간 팀워크가 공고해졌고, 신노스케가 단순히 사고를 일으키는 극중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리를 잡아갈수록 온 가족이 재미있어 할 만한 요소가 늘어났다.
크레용신짱의 매력을 이야기할 때, 그림을 빼놓을 수 없다. 엉성하고 열린 느낌, 이른바 ‘미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림체지만 오히려 어린이 장난 같은 떠들썩함이 있는 전반적 이야기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 평면적인 느낌의 시각화가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의 빠른 비약은 개그에 효과적이다. 특히 주인공 신노스케의 모습은 만화사에 길이 남겨야 할 정도로 탁월한데, 고구마 얼굴, 송충이 눈썹, 호기심과 생각 없음을 동시에 담아내는 커다란 눈 등이 이루는 성격 표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쉽게도 최근 우스이 요시토 작가가 등산 중 실족사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일본에서만 십수년간 5000만부를 판매한 인기 시리즈가 50권을 채 못 채운 상태에서, 완결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이 작품을 하나의 일상으로 만들어준 그 따뜻한 왁자지껄함을 1권 처음부터 다시 펼치며 즐겨보자.
김낙호 만화연구가 capcolds@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