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며칠 전 국내 대기업의 한 최고정보책임자(CIO)가 근황을 전하며 한 얘기다. 그만큼 업무가 많다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왜 이런 표현까지 써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 모바일 오피스 환경을 구현하기 위해 임원들을 대상으로 블랙베리 폰을 지급했는데, 쏟아지는 업무 요청을 실시간으로 대응하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없습니다.”
이 CIO는 점심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 심지어 샤워를 하는 와중에도 블랙베리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모든 것이 실시간 업무 처리 환경으로 바뀌면서 답변을 늦게 하면 자신이 꼭 제때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듯한 죄책감(?)마저 든다는 것이다. 물론 모바일 업무 환경이 구현되면서 메일을 언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고, 관련 자료도 요청하면 바로 공유할 수 있게 된 만큼 업무 효율성이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지면서 일에 대한 긴장감도 크게 늘었다. 긴강감이 생기는 것은 적절한 수준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 하지만 긴장감이 지나치게 가중되면 업무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모바일 오피스 환경을 도입한 일부 기업에서는 업무 처리 내역 등의 데이터를 개인별로 분석해 정기적으로 발표한다. 관련 내용을 인사 고과에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통계를 접하는 임직원들에게는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분발하라는 메시지로 들리기 십상이다.
금융 회사의 한 CIO도 최근 모바일 오피스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단말기를 테스트하면서 기대반 우려반이라는 심정을 내비쳤다. 모바일 오피스 환경이 향후 가야 할 방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보안 문제와 직원들의 반발 등이 크게 우려된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스마트폰이나 블랙베리 폰을 ‘족쇄’라고 하거나, 유무선통합(FMC) 서비스를 ‘수갑’을 채우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업무 혁신을 위해 모바일 컴퓨팅 환경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피한 추세지만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역기능을 우려한 것이다. 또 일거수 일투족을 회사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개인으로서는 반길 만한 상황이 아니다.
모바일 환경에서 모든 데이터는 중앙 서버에 자동 저장, 관리된다. 즉, 직원들이 휴대폰으로 무엇을 하는지 모두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현대판 ‘빅 브라더’라는 얘기가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많은 그룹사와 기업들이 모바일 오피스 환경을 앞다퉈 구축하고 있다. 구축 방법은 각기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업무 혁신이라는 사상과 목표는 비슷하다. 전사적으로 모바일 오피스를 확대 적용해 나가는 기업은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 오피스가 직원들을 옥죄는 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툴로 자리매김하게 하려면 변화 관리와 합리적인 모바일 근무 정책 마련 등 좀 더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