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른바 ‘관리 업무’를 맡게 된다. 나는 IT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프로젝트 리더 업무로 관리자의 첫 경험을 하게 되었고 경험이 늘어가면서 프로젝트 매니저(PM), 프로젝트 오너를 거쳐 최고정보책임자(CIO)라는 또 다른 명칭의 IT 관리자가 되었다. 비록 위치와 명칭은 달라졌지만 IT 관리자로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의사결정의 중요성과 어려움이다.
특히 예산과 시간의 제약 속에 요구되는 품질을 지켜내며 고객사, 개발사, 협력사 등 이해당사자 간의 갈등을 조율하고 그들의 능력과 협조를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이슈에 대해 모든 이해당사자가 100% 만족하는 방안을 찾아낸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더욱 중요해진다.
또 의사결정권자는 의사결정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순간순간 기분에 따라 임기응변 식으로 의사결정을 번복한다면 조직 전체가 방향을 잃고 위기에 빠질 것이며, 시간과 비용에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의사결정권자들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나는 ‘원칙’ ‘유연성’ 그리고 ‘조화’라는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사결정 기준을 ‘원칙’으로 꼽은 이유는 객관적이며 판단하기 쉽고 상호 이해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제안한 안에 관계자들이 미리 약속한 원칙에 위배되는 사항이 있는지 네거티브 방식으로 제거하면서 의사결정한다.
내 원칙에는 오랫동안 숙고하고 경험을 통해 세운 장기적인 원칙과 해당 과제에 국한된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원칙이 있다. 가치창조, 진정성, 사회기여, 장기적 비전, 자기관리 등이 장기적 원칙이라면, 비용절감, 편의성, 응답속도, 정합성 등이 단기적 원칙이다. 원칙은 지켜질 때 빛을 발하는 것이며, 일관성을 잃어버리면 원칙이라고 볼 수 없다. 원칙은 이슈에 대한 판단의 잣대다.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 덕분에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기준인 ‘유연성’은 나 자신이 결코 천재가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이슈에는 여러 원인과 조직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각각의 이슈들은 반드시 해결을 위해 준비되거나 경험과 통찰력을 가진 사안별 전문가가 있게 마련이다. 만약 관리자가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독불장군처럼 의사결정을 한다면 아마도 그 조직은 전문가가 필요 없는 조직이거나 전문가가 모두 떠날 조직일 것이다.
관리자는 뛰어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전문가의 의견을 제대로 듣고 조직의 목표에 맞는 최선의 방안을 유연하게 찾아내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나는 다행히도 여러 방면에서 훌륭한 능력을 갖춘 많은 전문가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있어서 내가 그들에 비해 결코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런 깨달음 때문에 더욱 경청하려 노력해야 했고 창조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해야 했다. 원칙 아래 최대한의 유연한 사고 덕분에 의사결정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대안을 찾았으나 그것이 서로 약속한 원칙과 위배될 때도 있었다. ‘원칙’과 ‘유연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어 어느 하나를 끝까지 고집하면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딜레마에 빠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기준인 ‘조화’가 그래서 중요하다. 원칙과 유연성이 충돌할 경우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데이터 모델의 중복성과 응답속도 문제가 충돌하거나, 일정 준수와 요구사항 변경 문제가 충돌한다면 어떤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나는 그 해답을 ‘조화’에서 찾았다.
열거한 이슈들처럼 원칙과 유연성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적인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여러 대안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가장 자연스러운 대안이 나타난다. 원칙을 내세우거나 유연성을 강조할 수도 있지만 이해당사자 간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가장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대안이 도출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다.
조화가 이루어진 해결책은 자연스러운 느낌이지만, 조화가 어긋난 해결책은 뭔가 힘겹고 거슬리는 느낌을 준다. 또 조화는 이질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인정하고 협력해야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동안 IT 관리자로서 내린 수많은 의사결정 중 지금도 변함없고 유효한 정답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때와는 달라진 환경과 시간 속에서 당연히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정답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요즘 들어 더더욱 조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서로 다른 대안을 주장하더라도 최고의 IT 시스템 구축이라는 공동의 과업을 함께 추진하는 사람들이라면, 또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의 의사결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원칙’만 고집하거나 ‘유연성’만 앞세우지 말고 그 속에서 ‘조화’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을까. 공동 목표를 가진 협력자로서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조화’의 포인트를 찾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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