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만화. 하지만 만화 안에는 여러 영역이 차곡차곡 겹쳐 있다. 사람에 따라 이 모든 영역이 합쳐져 하나로 보이기도 하고, 자기가 잘 아는, 좋아하는 영역만 보이기도 한다. 이미지 프로그램인 포토숍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포토숍은 이미지를 생성할 때, 다양한 레이어를 둔다. 모든 레이어를 합치면 하나의 그림이 되지만, 필요에 따라 특정 레이어를 하나씩 보기도 하고, 합쳐 보고 싶은 레이어만을 합치기도 한다. 포토숍에서 만든 이미지처럼, 만화는 여러 레이어가 하나로 합쳐 있다. 전문가라면 만화 안에 들어 있는 레이어를 하나씩 모두 살펴봐야 하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한국만화는 크게 카툰, 이야기만화, 시사만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세 영역이 다시 나뉘어 복잡하게 분화된다. 이야기만화라면, 독자중심 구분으로 어린이 만화, 여성만화(순정만화), 청소년만화, 소년만화, 성인만화 이렇게 나뉘기도 하고, 분량중심 구분으로 단편, 중편, 장편으로, 내용중심 구분으로는 스포츠, SF, 판타지, 추리, 공포, 로맨스, 액션 등으로, 가치사슬의 구분(창작-제작-유통-소비)에 따르면 잡지만화, 학습만화, 웹 스크롤 만화, 아마추어 동인만화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카툰, 이야기만화, 시사만화의 세 영역은 삼각의 균형을 이루며 한국만화 역사를 이루어왔다. 즉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한국만화 역사는 똑바로 서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근대만화는 유머, 풍자, 이야기의 갈래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카툰, 이야기만화, 시사만화가 지금처럼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갖고 창작·유통·향유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풍자, 유머, 이야기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만화는 해방 이후 일간신문이라는 안정된 매체를 기반으로 시사만화가 분화됐다. 이야기 만화는 잡지와 단행본을 통해 분화됐다.
그러나 카툰은 내용적으로는 풍자, 유머, 이야기가, 형식으로는 한 칸, 네 칸, 한 바닥(한 눈에 들어오는 정도의 분량)이 뒤섞여 존재했다. 창작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툰작가의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작가가 등장한 것은 사실 1970∼1980년대 들어서다. 그 이전에는 많은 만화가들이 카툰, 이야기만화, 시사만화의 모든 영역을 넘나들었다. 특히 카툰은 마치 만화의 기본처럼 받아들여졌다. 이야기만화를 하려는 작가들도 때때로 카툰을 그렸고, 시사만화 작가들도 카툰을 그렸다. 역으로 카툰을 하고 싶었던 카툰작가들이 이야기만화나 시사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한 칸 안에 유머, 풍자, 서정 등을 담은 카툰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다. 미군 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미국 잡지에 실린 카툰, 주로 에로틱한 유머 카툰들이 당시 대중잡지에 수록됐다. 50년대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잡지인 ‘아리랑’을 보면 1956년도부터 ‘아리랑 고개에서 쉬어가는 만화’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이런 경향은 이후 우리나라에 저작권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지속됐다.
1979년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만화비평 기사가 실렸고, 연이어 신인만화공모가 시작됐다. 1979년 1회 공모에서는 김마정, 1980년 2회 공모에서는 강창욱이 당선됐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카툰’이 1쪽 전면을 전부 할애해 소개됐다. 이전까지 카툰은 주로 지면의 여백을 메우는 역할을 했었지만, 뿌리깊은 나무에 이르러 카툰 지면이 자기 정체성을 갖고 독립한 것이다.
1985년 모리스 앙리의 ‘동키호테의 탈출’이 출간됐다. 모리스 앙리는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한 만화가로 만화에 초현실주의를 접목시킨 카툰을 발표했다. 단아하고 정갈한 이미지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85년 성인만화잡지 ‘만화광장’이 12월호로 창간됐다. 80년대 한국만화가 맞이한 다양성의 르네상스의 성과였다. 이후 만화광장은 한국카툰발전의 든든한 토대가 됐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nterani@c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