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해외 글로벌 기업들은 글로벌 IT 통합 프로젝트를 통상 5∼8년에 걸쳐 진행한다. 프로젝트 도중 패키지를 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기도 하고 수년에 걸쳐 진행되는 바람에 비즈니스 환경이 변하면서 처음 수립한 아키텍처가 적합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 때문에 해외 글로벌 기업에서는 시스템 완성도를 목표로 수년에 걸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회의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시장 환경과 비즈니스 상황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는 게 큰 이유다.
“본사에서 몇 년 동안 추진하다 실패한 프로젝트를 한국 사람들이 하니 되더라.” 최근 한 글로벌 제조기업 임원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이 기업은 최근 글로벌 전사자원관리(ERP)와 글로벌 제품수명주기관리(PLM) 프로젝트를 미국 본사가 아닌 한국 지사에서 주도해 단계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있다. 해외에서 수 차례 시도하다 실패한 프로젝트들인데 한국 지사가 주도해 추진하니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구축을 완료했다며 놀란다는 것이다.
이 임원은 “한국 지사의 IT 프로젝트 추진력이 남달라 일정 기간을 정해 주면 그 안에 맞춘다”고 말했다. 기한을 맞추기 위해 한국 지사에서 많은 고생을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접근 방식의 차이에 있다. 최근 기업들의 수많은 업무가 IT 없이 이뤄질 수 없듯이 IT 프로젝트 추진 방법도 기업의 업무 효율성에 직결되는 요소다.
글로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이 한국인 프로젝트매니저(PM)는 기자에게 “모든 것을 완벽히 개발한 후 오픈하려고 하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고 구축 내용도 오히려 시스템 개발자 중심이 될 수 있다”며 “우선 핵심 기능을 빠르게 구축해 오픈, 사용자들이 쓰도록 한 뒤 사용자의 생생한 요구사항을 다시 반영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귀띔했다.
처음부터 시스템의 기능을 모르는 사용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애써 개발해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 사용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용자 의견을 반영한 시스템이라고 해도 활용률은 낮을 수 있다. 투입된 시간과 노력이 아까울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엔 완벽하지 않더라도 우선 오픈해 사용자들에게 기능을 익히게 한 후 사용자들이 요청한 수정 및 개선 사항을 시스템에 반영하는 게 사용자 편의성을 더 높일 수 있다고 이 임원은 지적한다.
최근 김경호 LG전자 정보전략팀장도 CIO BIZ?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모든 IT 프로젝트를 핵심 요소 오픈 후 필요 사항을 수정하는 체제로 갈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엔드투엔드(End-to-End)로 개발해서 오픈하고 다시 수정하는 것보다, 일부 오픈한 후 추가로 개발하는 것이 훨씬 품이 덜 들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초기 오픈까지는 속도가 빠르지만 시스템 완성도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사용자 편의성을 높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해 농심도 단 8개월 만에 ERP, 공급망관리(SCM), PLM 등 핵심 시스템 구축을 완료해 화제가 됐다. 농심 관계자는 “빠른 시스템 구축의 비결은 구축 이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프로세스 혁신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IT 프로젝트의 속도와 완결성을 저울질하기 전에 시스템 구축에 대비해 기업의 프로세스와 조직에 대한 정비가 충분한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많은 기업들이 사전 프로세스 혁신 없이 ‘시스템의 완성도가 곧 혁신의 완성’이라는 생각에 묻혀 시스템 구축 기간을 연장하고 컨설팅에 많은 비용을 소모하거나, 또 종종 실패하기 때문이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