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도심에 위치한 브랜우드 매그닛 센터 3학년 과학시간. 운동장에 모인 20여 명의 학생이 교사가 든 돋보기를 주시한다.
“돋보기를 이렇게 검은 종이에 대고 한참을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피터, 어떻게 되지?”
“종이에 불이 붙어요.”
“그럼 잭, 왜 그렇게 되는걸까?”
“돋보기 렌즈가 햇빛을 모으면 종이가 뜨거워져서 타게 되요.”
“이 돋보기 렌즈는 뭐라고 부르죠?”
“볼록렌즈(convex)입니다.”
철자법을 묻자 학생들은 다 같이 큰 소리로 ‘c, o, n, v...’을 외친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이제 가지고 있는 돋보기로 불을 붙여도 좋다”고 하자 아이들은 그제서야 종이를 꺼내 조심스레 돋보기를 댄다.
잭 윤(10)은 가장 먼저 손을 들며 “불이 붙었어요!”라고 말했다. 교사는 과학책에 나온 개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는다. 가정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3학년 단계에서 배우는 ‘발화’의 개념과 원리를 터득하도록 유도한다. 사물에 대한 적절한 표현과 철자법 등을 동시에 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통합 학습도 꾀한다.
교사는 가르치지 않지만 학생들은 배운다. 마치 ‘자석(magnet·매그닛)’이 철가루를 끌어모으듯 지식이 달라붙는다. 바로 미국의 융합형 영재 교육 방식인 ‘매그닛 프로그램(magnet program)’이다.
◆인종을 넘어, 편견을 넘어 창의적인 인재를 키운다
매그닛 프로그램은 1977년 LA통합교육구(LAUSD) 내 각 학교 학생 구성이 인종별로 편중되자 이를 완화할 목적으로 도입했다. 원래 매그닛 스쿨은 인종, 문화, 경제, 성적, 환경에 관계없이 각 지역 공립 초 · 중 · 고교생들을 통합해 지역적 편차를 줄여 교육하는 곳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공립학교 학부모들 사이에서 이 교육과정이 우수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원더랜드 매그닛 프로그램(magnet program)처럼 다양한 영재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학교가 많다. 이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모든 재학생이 일종의 입시 시험을 거쳐 들어온 ‘매그닛 스쿨’과 일반 학교에서 일부 학생만을 대상으로 별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매그닛 센터’로 나뉜다. 매그닛 스쿨은 수학, 과학, 기술, 예술, 의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나누어진다. 매그닛 센터는 영재나 수재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한인에게 인기가 좋다.
LA교육구의 매그닛 프로그램은 올해 가을에 신설된 11개 학교를 합쳐 총 173개로 정원은 1만6000명 정도인데 매년 접수되는 신청서는 6만5000건에 이르고 있어 수치상 4대 1의 경쟁률을 육박한다. 통상 매그닛 프로그램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구분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까지 통합적으로 운영되는 학교, 중학교까지만 운영되는 학교, 초등학교 일부 과정만 운영되는 학교도 있다.
그 중에서도 수학·과학·기술(Math and Science) 매그닛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양질의 프로그램을 이수할 수 있기 때문.
밴나이스고교 카운슬러인 김순진 박사는 “각 분야의 매그닛 프로그램 마다 필수과목이 달라 그 분야에 관심이나 흥미가 없는 학생들은 적응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일부 매그닛 프로그램은 학생이 그 분야의 능력과 실력을 갖추지 않을 경우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매그닛 프로그램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수학·과학·기술 매그닛 프로그램은 초, 중, 고 수준에서 67개가 학교가 있다. ‘빈티지’초등학교와 ‘윈저힐스’ 초등학교를 제외하면 대부분 매그닛 스쿨(full magnet)이 아닌 매그닛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학교들이다.
◆원더랜드 애비뉴 초등학교 매그닛 스쿨
노스 헐리웃 산중에 호젓하게 자리잡은 원더랜드 초등학교. 겉보기에는 영세한 시골학교처럼 보이는 이 학교는 LA 통합교육구에서 몇 안되는 전과목 영재 프로그램을 갖춘 매그닛 스쿨이다. 원더랜드 초등학교는 2006년도 LA 통합 교육구 최우수 초등학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매년 초 매그닛 스쿨 입학신청 시즌이 되면 원더랜드 초등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문의가 쇄도해 학교 행정이 마비될 정도다.
원더랜드 초등학교는 LA시내 여타 학교들과 달리 백인학생의 비율이 높은 편이며 한인학생비율은 약 10퍼센트 정도다. 학부모회 활동을 한 적 있는 제니퍼 주씨는 “매그닛 스쿨은 저렴하지만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원더랜드 초등학교는 전과목에 걸쳐 영재프로그램을 갖춰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들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학년에 상관없이 속진도 가능하다. 역사시간에 이집트 문화를 배운 뒤 피라미드 등 이집트 건축을 깊이 연구하기도 한다. 학급당 학생수가 20명 정도로 미국에서는 적지 않은 편이지만 교사가 학습목표와 교육성과를 면밀히 체크한다. 최근에는 독서와 토론수업 열풍이다. 인터넷 보급으로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에 자료를 걸러내고 내용을 분석하는 능력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제니퍼 주씨는 “원더랜드 초등학교는 학과 수업이외에도 댄스, 음악, 미술 등 애프터스쿨 프로그램도 알찬 학교”라며 “학교방침이 공부만 잘하는 학생보다는 모든 방면에 재능을 갖춘 창의적인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라 좋다”고 덧붙였다.
◇인터뷰-원더랜드 애비뉴 초등학교 4학년 제니퍼 양(Jennifer Yang)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에 정답은 없어요.”
가을 햇살이 쏟아지던 오후, 학교를 막 마치고 LA한국교육원으로 온 제니퍼 양(사진)은 “숙제가 많긴 하지만 학교가 너무 재밌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가져온 숙제를 보여주면서 “오늘 숙제는 숫자 빈칸 채우기인데,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정확히 대면 선생님은 맞다고 해주실 것”이라며 “하지만 그게 타당한 것(make sense)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아이들의 사고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다.
원더랜드 애비뉴 초등학교는 철저히 교사 중심제다. 과학, 수학, 미술, 체육 등 교과목이 따로 나뉘어져 있지만 교사의 의지에 따라 혼합(mix-up)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체육 시간에 공을 세면서 수학 학습을 할 수 있고, 역사 시간이지만 지도에 색칠을 하며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융합형 교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제니퍼 양은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지난 해 여름방학에 우주 과학 캠프를 갔던 일”이라며 “숲 속에서 2박 3일 동안 지내면서 모형 로켓 등을 만들고 별도 보면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올해는 사이언스 캠프를 간다”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제니퍼 양의 어머니는 “한국도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아직까지 미국 매그닛 프로그램이 아이들을 배려해주는 정도는 안되는 것 같다”며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 학부모로써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인터뷰-미국 LA 교육국 행정 총괄 캐시 로페즈(Cathy Lopez)
“매그닛 프로그램을 단순히 영재 교육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미국 LA의 교육국에서 행정을 총괄하고 있는 캐시 로페즈(38·사진)는 “매그닛 프로그램은 영재 교육보다 범위가 훨씬 넓다”며 단호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미국의 영재교육에 대해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며 “현재 50개주 가운데 32개 주가 영재교육을 의무화해 주정부를 중심으로 획일성을 지양한 특색있는 교육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방정부는 실제로 영재 학생 가운데 소외계층이나 영어에 서툰 학생을 위해 연간 1000만 달러 이상을 배정하고 주 정부는 적극적으로 예산을 편성해 집행하고 있는 중이다. 창의적인 인재가 곧 국력이라는 생각에서다.
“영재교육은 학습속도, 깊이, 난이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어떻게 내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사가 가르치기보다 과제 중심, 질문 중심으로 스스로 탐구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는 학생 뿐 아니라 교사들도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마다 방침이 다르긴 하지만 어떤 교사들은 영재교육 연수를 매년 32시간 이상씩 받아야 한다”며 “그 이상을 요구하는 학교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교사뿐만 아니라 교장 학생 학부모도 교육을 받아야 효과가 있기 때문에 수시로 학부모 워크숍을 열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