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온라인 그리고 전시장에서 만나는 카툰 - 한국 만화 100년, 한국 카툰 100년②
한국 카툰 역사에서 1980년대 후반은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 카툰 연대기를 바라볼 때 딱 두 시기로 전후를 구분하면 그 기준을 1985∼1987년으로 잡는 것이 제일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1985년과 1987년, 카툰 환경을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할 두 잡지가 창간됐기 때문이다. 진지한 시선으로 만화를 바라본, 그래서 지금까지의 만화잡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만화광장’이 1985년 12월에, 카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적극적으로 신인을 발굴한 ‘주간만화’가 1987년 5월에 발행됐다.
한국만화사에서도 이 두 잡지의 의미는 적지 않지만 한국 카툰 역사에서는 어느 주요 사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두 잡지는 만평, 단 컷, 한 컷 등으로 불리던 카툰에 ‘카툰’이라는 이름을 찾아주었고, 이름 없이 불법으로 복제돼 소개된 외국 작가들의 이름을 찾아주었으며, 여백을 채우는 카툰이 아니라 작품에 어울리게 카툰 지면을 운영했다. 두 잡지에서 소개한 외국 카툰은 젊은 카툰 작가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고, 두 잡지가 제공한 지면은 카툰 작가들이 커나갈 풍요로운 밭이었다.
만화광장과 주간만화의 터전에서 자라난 한국 카툰은 1988년 출판 자유화 조치 이후 쏟아진 수많은 잡지로 이식되며 풍요롭게 영글어갔다. ‘만화세계’ ‘만화선데이’ ‘매주만화’ 같은 만화잡지는 물론이고 ‘만화시대’처럼 시사만화잡지도 창간됐고, 심지어 야구와 만화를 다루는 ‘만화펀치’, 만화와 낚시를 다루는 ‘주간낚시’ 같은 잡지도 창간됐다.
1990년대 들어 지면은 더욱 확대됐다. 1990년 3월 21일 세 번째 스포츠신문인 ‘스포츠조선’이 창간되면서 3대 스포츠신문의 경쟁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 와중에 만화의 주가는 치솟았다. 스포츠신문에도 카툰 연재 코너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1년 4월 사이로·김마정·조관제·신송균 등이 모여 서울카툰회를 결성했다. 카툰 작가들이 먼저 깃발을 들었다. 1991년 서울만화전이 개최됐으며, 1992년에는 대전국제만화전이 개최됐다. 이름은 만화전이지만, 카툰 공모전이었다. 1980년대 후반 우후죽순처럼 쏟아진 성인만화잡지들이 퇴장하고, 1995년 1월 ‘빅점프’, 5월 ‘미스터블루’가 등장했다. 이들 새로운 성인잡지도 카툰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1988년 이후 늘어난 기업의 사보마다 카툰 지면이 생겨났다. 1980년대 성인만화잡지에서 시작해 스포츠신문과 1990년대 성인만화잡지 그리고 사보로 이어지며 1990년대 한국 카툰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언제까지 계속되지 않았다. 1997년 만화계는 IMF 경제위기와 청소년보호법의 된서리를 맞게 된다. 성인용 매체를 분리 진열해야 하는 청소년보호법으로 인해 서점의 판매대에서 성인만화잡지가 사라졌고 결국 폐간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 경제위기 속에 사보가 사라졌다. 1990년대 호황을 겪던 카툰은 매체를 잃어버리고 방황했다.
1990년대 후반 방황하던 카툰이 찾은 길은 디지털과 전시였다. 카툰은 디지털과 만나 웹툰으로 진화했다. 1990년대 후반 초고속통신망이 깔리고, 인터넷 활용이 일상적 풍경이 되며 이를 기반으로 카툰을 창작·유통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웹툰의 가능성을 보여준 만화는 ‘광수생각’이었지만, 디지털로 창작·유통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한 만화는 ‘스노우캣’이었다. 이제 카툰은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게시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카툰이 찾은 두 번째 활로였다. 카툰은 풍부한 유머와 수준 높은 이미지를 무기로 전시장을 찾았다. 중견 작가들은 개인전을 열었고, 젊은 작가들은 ‘엎어컷’ ‘유머아트’ 등의 모임을 결성해 기획전을 개최했다. 흔히 카툰을 이야기 만화의 기초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만화이자 예술이다. 종이, 디지털 그리고 전시까지. 오늘도 한국 카툰은 끊임없는 활력으로 독자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nterani@ck.ac.kr